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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기 - 홍은전 작가 “무슨 심리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큰 강당 같은 데에서 일단 아무렇게나 빨리 걸으라고 해요. 정해진 길은 없어요. 그냥 가다가 부딪혀도 되고 사람들 치면서도 돼고 무조건 가래요. 수십 명이 그 강당에서 막 움직이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일이 펼쳐질 것 같아요?” 그가 물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몸이 졸아들어서 “난 그냥 구석에 있을래요.” 했다. “거기에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치면서 다니는 사람이 있고, 아주 빠르게 피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있고, 은유 작가님이나 저 같은 부류가 있고. 저는 주저앉았어요. 너무 괴롭더라고요. 그런 광경을 보는 것 자체가.” 홍은전과 인터뷰 때 나눈 이야기다. 이런 성향이라서 우리가 한구석에서 글을 쓰는가보라며 같이 웃었다. 나는 경쟁이..
은유의 연결 - <그냥, 사람> 홍은전 작가 사범대 4학년생 은전은 딱 1년만 방황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거대한 선착순 달리기 시합 같은 임용고시가 두려웠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지 알아볼 겸 노들장애인야학을 찾아갔다. 건물 입구에는 휠체어를 탄 남자 셋이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은전은 뒷걸음질 쳤다. 난생처음 ‘실물’ 장애인을 본 몸의 자동 반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되돌아갔다. 장애인보다 무서운 것은 내 안의 편견이란 생각이 스쳤다. 용기 내어 노들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가 2001년 8월24일 목요일 저녁 7시40분, “길 가다가 맨홀에 떨어지듯” 홀연 다른 세계로 빠져든 순간이다. 그는 노들야학 교사가 되었으나 가르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했다. 20∼30년을 방안에만 갇혀 산 사람을 야학에 오게 하는 법, 휠체어 ..
은유의 책편지 - 아이들의 계급투쟁 고등학교에 강연을 가면 학생들이 제게 묻곤 했습니다. ‘자기소개서 잘 쓰는 법’이나 ‘문창과를 반대하는 부모님 설득하는 법’ 같은 것을요. 그런데 그날 당신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죠. “저는 대학에 진학할 뜻이 없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소속이 없어지는데 누구랑 책을 같이 읽고 토론을 해야할까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대학에 안 간다는 학생도 처음, 제도교육 바깥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제기한 당사자 학생도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통통 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떠오르는대로 말했습니다. 관심 있는 시민단체나 정당에 들어가 청년모임 활동을 하거나 가까운 동네책방을 찾아가보라고요. 어디 마음 붙일 곳을 찾았는지요? 저도 당신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계속 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성별, ..
인터뷰 후기 - 원도 작가 얼마 전 정신질환을 앓던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웃들이 악취가 풍긴다고 집주인에게 전했고,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해 모녀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전엔 이런 뉴스를 보면 ‘모녀’에 온통 신경이 쏠렸다. 이제는 다른 사람도 보인다. 저 ‘악취 풍기는 시신’을 처리하는 존재 ‘경찰’을 생각한다. 이는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법을 글에 부려놓은 사람, 를 쓴 원도 작가 덕분이다. 그가 큰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매일 목도하는 사건의 비참에 눈감지 않을 수 있는 힘. 한바탕 통곡하고 싶은 밤마다 꾸역꾸역 글을 쓸 수 있었던 힘의 소유자다. 용기와 끈기의 원천이 궁금해서 인터뷰를 시도했다. 원도는 지역민, 여성, 장애인 가족으로 살아면서 불편을 숱하게 겪었고 ‘힘’을 갖고싶어서 경찰관이 됐다고 했다. ..
은유의 연결 - <경찰관속으로> 원도 작가 원도(27)는 한 지방경찰청 소속 과학수사대에서 일하는 여성 경찰이다.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화재, 살인, 자살 등 ‘죽음의 자리’로 출동해 주검을 수습하고 범죄 혐의점을 확인하는 현장감식 요원으로 활동한다. 스물셋에 경찰이 된 후로 줄곧 그랬다. 생과 사가 뒤엉킨 악취가 밴 현장을 누볐다. 천태만상의 사건,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의 죽음에 ‘끝내’ 무뎌지지 못한 그는 오늘 본 비극을 ‘나’라도 기억하기 위해 글을 썼고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자 책으로 묶었다. 제목은 . 마치 ‘관’속으로 출근하는 심정으로 눌러 쓴 이 책은 일선 경찰들과 동네책방 독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1만5천부가 넘게 팔렸다. 생각 많은 막내 경찰은, 그렇게 본 것을 봤다고 말함으로써 작가가 됐다..
2020.9.21 1. 팡팡 작가의 우한일기 추천사를 썼다. 500쪽 가량 되는 원고를 다 읽었다. 어제 몸이 아픈데도 그 무거운 거 들고 카페 가서도 봤다. 매일 기록하는 것, 비상사태에서 상황을 읽어내는 일의 중요성을 배웠다. 재난의 시대를 통과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기록만을 남길 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쓰는 일을 하고, 배달노동자는 배달을 하고, 청소노동자는 청소를 한다. 각자 자기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로 일상이 세계가 굴러간다는 자명한 진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중요한 기록을 우한에서 60년을 산 작가가, 도시에 대한 애정으로 보고 듣고 썼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우한은 코로나의 발원지라는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팡팡이라는 작가를 준비한 행운도 있는 도시다. ..
2020.9.15 "집사람 생일에 장미꽃을 선물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전주역에서 강연장까지 가는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말을 건다. 차창을 향해 있던 고개가 절로 앞을 향했다. 백미러에 비친 기사님 얼굴을 보니 '어르신'이다. 물기가 빠진 탁한 목소리와 뒷목의 주름으로 보건데 67세 추정. "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당연히 당연히 괜찮고 너무 좋죠." 나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기사님은 "근데 꽃은 이삼일 만에 시드니까"라며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우선 꽃선물은 받는 순간 기쁨이 크고, 이삼일이라도 눈길 스칠 때마다 행복한 게 어디냐, 향기가 진해서 심신 안정에도 좋다, 꽃선물을 받으면 스스로 꽃처럼 예쁘고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자존감이 상승 효과가 있다 등등 의견을 피력했다. (이럴 일인가?) ..
은유의 책편지 - 분노와 애정 “산후통에 우울증까지 와서 힘든 시간이었어요. (…) 저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어요. 시도때도 없이 눈물나고, 몸도 마음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고요.” 생후 50일 된 아기 사진과 함께 당신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소식 전해주어 고마워요. 아기는 예쁘고 당신은 아프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반은 웃고 반은 울고 태극 문양처럼 둘로 나뉘었어요. 붙여 쓴 네 번의 ‘너무’가 꼭 길게 늘어진 비명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안쓰러운 마음에 ‘어서 만나 수다 떨자’는 답장을 부랴부랴 보냈는데요, 얼굴 보기 전에 급한 대로 당신과 사려깊은 대화를 나누어줄 위로의 사절단을 파견하려 해요. 에이드리언 리치, 어슐러 르 귄 등 여성 작가 16명인데, 그들이 엄마됨에 관해 쓴 글을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