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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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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궁금한 거죠? “세상에 저런 일이 어딨어.” 아버지는 TV를 보면서 늘 말씀하시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말도 꼭 덧붙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세상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지? 말도 안 된다면서 굳이 보면서 욕하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자라서 세상에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백발 성성한 아버지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온순한 시청자가 됐다. 아랫집에 사는 60대 초반의 어르신과 엘리베이터에 가끔 동승한다. 오전에 눈곱만 간신히 뗀 몰골로 대파가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들고 있을 때도 보고 저녁 강의를 마치고 노트북 가방 멘 채 밤 12시에 마주치기도 한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하루는 남편이 말했다. “아랫집 아저씨가 당신 무슨..
<혼자 가는 먼 집> 과제리뷰 - 정념엔딩 허수경의 을 읽고 쓴 여러분들 과제를 읽어보았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문장이 안정적이고 줄거리도 제법 잘 읽힙니다. 글이 재밌어졌습니다. 문득, 저도 글이 쓰고 싶었어요. 억지로라도 과제를 내야하는 여러분이 질투가 나고 부러웠습니다. 이번이 벌써 7차시 과제이더군요. 매주 한 편의 글을 낳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전전긍긍 하다보니 변화가 일어나는구나, 성급히 그런 판단을 내려 보기도 합니다. 모든 반복적인 행위는 힘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틀어놓는 법이니까 아주 근거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수업의 가장 큰 공부는 자기가 쓴 글만이 아니라 다른 학인들의 글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쓰니까 재밌다’ ‘이건 좀 밋밋하다’를 가늠하실 거에요. 그게 가장 큰 공..
허수경 / 늙은 가수 허수경 시집 네 권을 열흘 째 가방에 넣어 다니고 있어. 앞의 7일은 세미나 준비하느라 읽었고 나머지 3일은 후기 쓰기 위해 훑어보려고 담아 다녔지. 어깨 아프네. 오늘은 후기를 꼭 써서 이제 그만 허수경과, 헤어지고 싶다.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창녀 아닌가, 제 갈길 너무 빤해 우는 거 - 중 제 갈 길이 너무 빤해서 우는 자. 그래서 눈물이 났나봐. 시시쿠나. 라는 표현에서 옳타구나. 했어. 시시해. 하면 푸석한데 시시쿠나. 하니까 촉촉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아직 그리 멀리 가버린 건 아닌데 여기까지 와 버린 길을 돌아 나가기엔 다리에 힘이 없다. 지금 이 포맷으로 이 구성으로 이 강도로 지하철2호선 순..
허수경 '킥킥 당신 이쁜 당신...'이소선 <어머니> ‘소선小仙’ 작은 선녀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작은데 태어났을 때는 을매나 작았겠느냐며 옛날이야기 하듯 당신 생의 기원을 더듬는 할머니가 정겹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삶을 담은 영화 를 보았다. 곱고 예쁜 이름만큼이나 영화가 소소하고 재밌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생 살아왔는데 그런 칭호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동자의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뭐라고 부르겄냐”고 조단조단 말씀하시는데 웃음이 난다. 질그릇처럼 투박하게 때론 놋그릇처럼 쨍쨍하게 때론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울리는 어머니의 일상. 창신동 좁은 골목길 올라간 방에서 고스톱을 판이 벌어진다. 어머니는 은행에서 출고된 포장용 동전꾸러미를 종자돈으로 꺼내놓으며 어느 금융위원장이 고스톱 칠 때 쓰라고 준 것이라고 자랑한다. 왼손에..
무심한 구름 / 허수경 한--, 청평쯤 가서 매운 생선국에 밥 말아먹는다 내가 술을 마셨나 아무 마음도 없이 몸이 변하는 구름 늙은 여자 몇이 젊은 사내 하나 데리고 와 논다 젊은 놈은 그늘에서 장고만 치는데 여자는 뙤약볕에서 울면서 논다 이룰 수 없는 그대와의 사랑이라는 게지! 시들한 인생의 살찐 배가 출렁인다 저기도 세월이 있다네 일테면 마음의 기름 같은 거 천변만화의 무심이 나에게 있다면 상처받은 마음이 몸을 치유시킬 수 있을랑가 그때도 그랬죠 뿔이 있으니 소라는 걸 알았죠 갈기가 있으니 말이란 걸 알았죠 그렇다면 몸이 있으니 마음이라는 걸 알았나 생선죽에 풀죽은 쑥갓을 건져내며 눈가에 차오른 술을 거둬내며 본다 무심하게 건너가버린 시절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 - 허수경 시집 , 문학과지성사 하루 참 길다.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