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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11.12] 대화 (12)

편지

[차오르는말들]

지금 파리는 새벽 한 시 반이고 남자친구도 강아지들도 다 잠이 들었어요. 공부하던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았다가, 잠 안 오면 한잔씩 마시려고 사다둔 술을 병 채로 마시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벽이고 술을 마셨으니까 감정적이어도 이해해달라고 자기변명을 하는 중이에요. 아니 이렇게 해야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어리광을 부려보는 중이에요....떠나...온...거 후회해요. 이제는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할 만큼. 왜 그때 떠나왔을까. 뭘 배우겠다고 떠나왔을까. 나 살던 공동체에서도 못 찾던 답이 여기에 있을 리 만무한데. 전 이제 비판 따위 할 자격도 없는 놈인 거 같아요.

언니는 자본주의가 뭐라고 생각해요? 소작농들의 처절한 일 년 농사를 다 앗아가는 지주나 노동자들의 노동의 대가를 다 가져가는 부르주아나 다를 것도 없는 더러운 세상에 그래도 신분제가 철폐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보였다고...언니 한 마디만 대답해주세요. 그럼 정말 믿을게요.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어떤 혁명가의 말보다두요... 어제 홍대 미화원 노조에 쌀을 인터넷으로 사서 보내놓고 전 제 자신이 용서가 안돼요. 나이라는 걸 먹으면 강해질 줄 알았고 강해지면 더 또렷해질 줄 알았는데 스무 살이건 서른 살이건 한국 이건 프랑스이건 저는 아직도 질문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이젠 제 자신에 대한 분노로 비판도 부끄러워 너무 부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도 없어요.

생태공동체건 유럽식 사회주의 복지사회건 모두 허울임을...설령 프랑스의 노동자가 잘 살고 한국의 노동자가 잘 살게 된 들 남미의 농민이 가난한 세상이면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왜냐하면 북반구의 산업 국가의 노동자들이 한때나마 임금이 올라 잘 살아도 그 구조적인 자본주의의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국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거... 내 공동체만 억울한 이 없으면 끝날 일도 아니기에. 눈만 뜨면 정보라는 이 세상에 1초면 이렇게 구만리를 넘어 글이 도착하는 이 세상에 연대조차 못하는 우리가 태연하게 사회의 잉여물로 공부라는 걸 했다는 저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에...언니, 미안해요. 질문이라는 거 계속하면 그거 답은 아니더라도 길은 보이겠죠? 그죠?

 


네 편지 읽으니 좋구나. 젊음이 느껴진다. 그런 고뇌, 그런 방황 나는 안 해본지 너무 오래된 거 같아. 보수적이 되어가는 증거겠지. 자명한 것에 물음을 던지지 않는 것 말이야. 떠나온 것 후회되니? 난 태어난 것이 후회된다. -.- 이 세계가 추악하고 나란 존재는 무기력하고 그래. 요새 인생 최대의 슬럼프를 보내고 있단다. 서울은 한 달 넘게 영하 10도 날씨가 계속돼서 마흔을 넘긴 내 몸은 완전 땅으로 꺼지려해. 그런데도 어젠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강의듣고 왔어. 살을 에는 찬바람 맞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남들처럼 무슨 학위 따고 연구자의 길을 갈 것도 아닌데...그냥 나의 갑갑함이겠지. 뭐라도 삶의 근거, 희망 나부랭이를 찾고 싶은.

산다는 것은 물음을 발명하는 일이지. 묻고 답하고 한 평생 그러다가 가는 거야. 물음이 멈출 때 투쟁도 끝나겠지. 네 공부도 이제 일 년 남았으니 좀 더 힘을 내렴. 일단 이루려던 목표는 이루고. 그곳이 서울이든 아프리카든 파리든 네 몫이 있을 거야. 혹시 공유정옥씨 아니? 운동권 의대생출신인데. 지금은 의사 그만두고 삼성백혈병 노동자 도우면서 노동보건운동 활동가로 일하더라고. 네 생각했어. 너도 의대 졸업해서 반도체산업 노동자들 위해서 일하면 좋겠다 싶더라고. 국제연대가 필요한 영역이기도 해서.

파리에 있으면서 홍대노동자 아주머니들에게 쌀을 보냈다니 나보다 훨씬 낫구나. 난 집에서 가까운데 아직 못 가봤거든. 그런 나누는 마음에 의학적 지식까지 갖추고 있으면 네 앎과 삶은 넘쳐흘러 누군가의 삶에 가 닿겠지. 우린 다 연결돼 있으니까 말야. 나는 궁극적으로 현장인문학이 하고 싶은데 이 세계를 덮고 있는 자본의 신을 벗어나 다른 삶의 척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삶의 공부를 하고 싶어. 근데 몸이 힘들고 아이도 둘이나 있고 머리는 안 돌아가서 괴로워. 그젠 남편이랑 싸웠어. 너도 알다시피 형부가 완전 순둥이인데 자기도 내가 외부활동이 많으니까 불편하고 싫은 가보더라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도 힘겹고 공부도 그렇고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만 그래도 피하는 건 비겁하겠다, 여길 극복하지 못하면 또 걸리겠다, 그런 생각해.

네 고민들 네가 회의하는 것들, 가치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해. 현대정치철학 지형에서도 물음으로 채택한 것들이고. 그걸 잘 품고 농익혀서 살다보면 어떤 우발적인 기회로 사건은 다가올 테고 네가 무언가 하고 있게 될 거야. 떠나온 거 후회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유학생활에 그런 위기와 갈등이 없을 순 없겠지. 결혼생활도 마찬가지고. 나도 남편과 싸우고 펑펑 울었어. 삶은 늘 그래. 외부가 없더라. 대단한 무엇 없이 소소한 일상으로 굴러가고. 그게 삶의 놀라움이겠지. 너무 큰 물음 세워놓고 내가 작다며 자학하지 말고, 싸우는 노동자들한테 쌀도 보내고 나한테 하소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우리 그렇게 살자. 힘내렴. 술 먹고 인류문제로 꼬장 부리는 후배도 있고,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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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차오르는말들]

# 산채정식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살 테니까 맛있는 거 골라 봐.
아네요. 선생님. 연락 못 드린 죄도 있고.. 제자가 모셔야 도리죠..

여기 음식 잘 나온다.. 다 내 취향이네..
그쳐? 절음식처럼 정갈하고 맛나더라고요. 왠지 선생님이 좋아하실 거 같았어요. ^^  

산채 한정식을 한 상 앞에 두고 반찬만큼이나 다양한 오방색 빛깔의 정담이 오갔다. 4년 6개월 동안의 해직교사 생활 이야기. 공부에 미련을 못 버린 사모님이 유학 간 이야기, 혼자서 아이 데리고 전교조 사무실 다니면서 육아한 이야기. 책과 대화로 키운 아이가 사교육 없이 외고에 가고 전액 장학금 받고 미국으로 유학 간 이야기. 아흔 넘은 노부와 함께 사는 이야기. 그리고 나의 남편과 아이들 사는이야기 약간까지. 드라마에서 내레이션으로 사건을 정리하듯이 주요 흐름만 짚어 17년의 공백을 메웠다. 사실 별다른 장황한 설명 없이도 짧은 단어 몇 가지만으로도 선생님의 지나온 삶이 훤히 읽혔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세월의 단절을 느낄 수 없었다. 아랫목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노곤해졌다.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선생님도 저도 그대로 같은데 아이들이 너무 컸어요. 실감이 안 나요. 17년 동안 냉동됐다가 해동된 거 같아요.ㅎㅎ
그러게 말이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니?
선생님이 아실만한 친구 중에 영란이만 연락하고 지내요. 영란이 기억나시죠? 삼성 다니던..
응. 알지.
영란이 그 때 노조 만들려다가 문제생겨서 그 일로 회사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갔는데 위장 취업한 남자랑 결혼했어요. 제적당했던 남편은 복학해서 졸업하고는  먹고살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죠. 남편이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려서 서울까지 유명학원으로 스카우트 되고 지금까지 꽤 잘 나가요. 그런데도 고액과외는 안 하고 단체로만 강의하면서 논술을 빙자해 아이들 의식화 교육도 하고.. 영란이는 남원으로 귀농해서 지역운동하고 있고요. 다른 친구들은, 관심분야가 다르니까 점점 멀어지고 연락이 끊기더라고요. 아주 가끔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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