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은유칼럼]

최근에 폭탄처럼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보면서 부대꼈다. 내가 당한 크고 작은 피해 경험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전해 들었던 피해자들 이야기가 일제히 대책없이 되살아났다. 몸의 기억이 들쑤셔져서 잠 못 이루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할 수 없다. 집단 트라우마다. 그 와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제목이 『용서의 나라』 라니 사실 미심쩍었다. 성폭력과 용서라는 말은 양립 불가능한 조합 같았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성폭력 피해 생존자 이름은 토르디스 엘바. 아이슬란드에 산다. 16살 소녀일 때 교환학생을 온 남자친구와 사귀었고 강간당한다. 가해자는 자기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버린다. 그후 토르디스는 섭식장애, 알코올 중독, 자해 등 고통을 겪다가 9년 만에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용서의 첫걸음을 뗀다. 

 

사건의 핵심 명제, 성폭력은 강자가 가까이 있는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것. 토르디스가 사랑하는 사람인 애인에게 당했듯이 내가 본 성폭력 피해자의 90%도 아는 사람에게 당했다. 아버지, 삼촌, 이모부, 오빠, 선배, 친구, 담임선생님, 교수, 직장 동료, 남편 등등. 그들은 힘으로든 돈으로든 지위로든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당했기에 여파가 크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로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나는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이 강간이라는 걸 몰랐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상처가 컸는데도 말이야.” (192쪽) 가까스로 인지한 다음엔 가해자가 아니라 자기를 혐오한다. “첫 이성 관계에서 참혹하게 실패한 후로 나는 스르로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23쪽)는 토르디스의 고백은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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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성폭력은 한 사람을 관계 불능의 존재로도 만든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에게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은 서른을 바라볼 때까지 친구도 애인도 없었다. 교우 관계나 이성 관계에서 친해질 만하면 떠나가는 식으로 관계를 기피했다고 한다. 믿었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철저히 능욕했는데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68쪽) 그래서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혐오하며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다 보면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거꾸로 보살핌 받기가 힘들어진다.”(223쪽) 

 

성폭력 피해자의 시간은 정지한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면, 왜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 말하느냐는 반응부터 나온다.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거다. 친척에게 17살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열일곱, 스물일곱, 서른일곱 등 10년 단위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 해마다 몸이 아팠고 일상이 무너졌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그 오빠의 딸이 결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복수를 꿈꾼다. 조카의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사실을 폭로하는’ 상상을 한다. 

 

토르디스는 16살에 강간을 당하고 25살에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건을 자기 밖으로 꺼내기까지 9년이 걸렸다.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이 없는 건 아니다. 피해자들은 “부서진 자아를 감추”(22쪽)기 위해 과도할 정도로 성취하거나 반대로 무기력에 빠져버린다. 겉보기에 멀쩡한 듯 일상을 영위하면서 내면에서 전쟁을 치르며 “나 자신이 주제하는 재판”을 수시로 여는 것이다. 

 

『용서의 나라』 에는 용서의 또 다른 주체인 가해자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톰 스트레인져는 깊게 반성하고 사건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여기서 적극성이란 최대한의 소극성이다. 토르디스가 주로 말하고 톰은 그저 듣는다. 침묵과 경청으로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표현한다.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간다. 

 

“너는 그날 밤 그래도 되는 권리가 네게 있다고 느꼈겠지.” (179쪽) “내가 여자라서 강간했잖아. (...) 넌 어디선가 배웠을 거야. 네 즐거움이 내 동의보다 더 중요하다고.”(282 쪽)  이 모든 진실 말하기를 겪어내고 톰은 의견을 낸다. “나도 일원이 되고 싶어. 문제의 한 축이 아니라 해결의 한 축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393 쪽) 

 

두 사람은 그렇게 용서를 도모한다. 8년간 300통의 편지를 교환하고, 16년 만에 중간지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한다. 쓰고 읽고 듣고 말하며 서로의 언어에 길들여지는 시간을 갖는다. 각자 어렸을 적부터 살아온 과정을 시시콜콜 나누면서 그 맥락에서 성폭력 사건을 들여다보고 이후 고통의 일상까지 소상히 공유한다. 이 탄탄한 밑작업을 통해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얻는다. 

 

토르디스는 말한다. 나는 강간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날 ‘희생자’로 만들진 않는다고. 사람은 평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한다고. 나라는 사람이 그날 밤 일어났던 일로 축소될 수는 없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거야. 그 짐이 원래 그 사람의 몫이라 하더라도 말이야.”(68 쪽) 

 

두 사람에게 용서란 자책을 넘어서 자기 행동으로 나아감이다. “자책하는 것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자기 채찍질로 이어져 자기 연민에 빠져 살게 만든다. 후자는 자기 너머를 보기 때문에 타인과 관련 지어 자기 역할을 찾아낸다.”(438 쪽) 토르디스와 톰은 자신들이 16년간 기울인 그야말로 “태산 같은” 노력을 가족에게 친구에게 차츰 터놓다가 책으로 테드 강연으로 모르는 전 세계 타인들과 공개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용서의 나라』 를 읽는 내내 분노하고 의심하다 안도했다. 성폭력 사건이 믿기지 않는 것만큼 용서의 귀결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저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가능하게 되어가는 장대한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성폭력 사건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거 하나는 분명하다. 용서는 신이 지급하는 쿠폰이 아니고 인간의 용기를 거름 삼아 자라는 나무라는 것.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용기다. “삶은 계속된다. 한껏 이용하라. 네가 가진 게 별로 없다 해도 삶만은 네 것이다.” (451쪽)

 

* 채널예스에 실림

이상한 정상 가족 - '불쌍한 아이' 만드는 '이상한 어른들'

[은유칼럼]

인터넷 광고 페이지에서 아기 사진을 보았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과 한 줌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가 누워서 천장을 보는 옆모습이었다. 작은 생명의 연약함, 무구함, 천진함이 몽글몽글 만져졌다. 자세히 보니 어느 사회복지 단체의 광고 홍보성 페이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아이들을 돌본다는 그곳은 이웃의 관심을 당부했고, 게시물 아래에는 ‘후원했다’, ‘우리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돕겠다’, ‘천사 같은 아기야 힘내라’는 댓글이 달렸다.

 

때는 연말, 날은 춥다. 원래 아기 사진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데다 순탄치 못한 서사까지 더해지니 나 역시 그 페이지를 휙 나가지 못하고 어정거렸다.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부모 없이 자라는 게 가여워서가 아니라 부모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고 살아가야 할 아기가 애처로워서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게 부모인가 돌봄인가. 한국사회에서는 오직 부모에게 전가된 돌봄이고, 그것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비극을 초래하는 것 같다.

 

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아이가 ‘비밀’이라는 글을 썼다. 너무 비밀이라 선생님만 봐야 한다며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내게 가져왔다. 자기는 아빠, 엄마가 없는데 그걸 친구들한테 말하지 못했고 제일 친한 친구에게만 아빠가 없다는 걸 말했다고. 자기는 친구 집에 놀러가지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수가 없는데, 여기도 집이지만 친구를 데려오면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진실한 글들이 그러하듯 읽으면서 아이의 불안과 감정에 전염되어버렸다. 아이의 비밀스러운 고민은 그때부터 나의 고민이 되었다.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은 왜 비밀이어야 할까. 만약 우리사회가 ‘정상’가족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지 않은 사회라면,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제대로 큰다는 이상한 믿음 체계만 없다면, 저 정상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지 낱낱이 드러난다면,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타인의 개별적 상황을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분위기라면, 아이는 비밀을 굳이 비밀로 채택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런 두서없는 물음과 한탄으로 꽉 막힌 속을 뚫어주는, 같이 한숨 쉬면서도 정확한 분노와 고민의 지점을 알려주는 미더운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김희경이 쓴 『이상한 정상가족』이다.

 

우리 사회가 유독 정상가족에 집착하는 이유가 나온다. “가족은 부계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166쪽) 그러니까 사회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가족 내부의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삭막하다. 각각 밥하고 돈 벌고 공부하는 도구적 존재로서 서로를 구실 삼아 정상가족의 그럴싸한 외양을 유지한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드는 부모라는 권력”(10쪽)은 체벌이나 학대 같은 친밀한 폭력을 은밀히 혹은 대놓고 행사한다. 아동인권단체에서 6년간 활동하며 ‘아이들의 수난사’를 지켜본 저자는 묻는다.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저 물음에 대해 난 고개를 반쯤 젓게 된다. 수년간 글쓰기 수업에서 ‘어른들의 성장기’를 접하면서 한 사람의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은 어김없이 가족의 뿌리에 닿아 있음을 보았다. 유년시절부터 노동에 지친 아버지는 술 마시고 엄마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었기에 이제 아버지가 죽어도 눈물이 날 것 같지 않다고 자식은 말한다. 일 나간 엄마 아빠를 대신해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의 노동력으로 동원되고 두 동생을 돌봐야 했던 어린 장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싸움에 휘말렸으나, 자식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매질을 한 엄마에 대한 30년 묵은 원망을 털어놓는다.

 

가족의 울타리는 핵가족 사회에선 억압과 공포의 밀실이 되기도 한다. 학창시절 최고 성적을 놓치지 않았던 아이는 너에게 들어간 학원비가 얼마인줄 아느냐, 1등을 못하면 강아지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며 과중한 학습 노동을 수행했고 끝내 정신의 질병을 얻었다. 물론 가족의 헌신과 지지로 좌절을 감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말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통이 더 깊고 크다. 저자 말대로 “문제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예컨대 친부모라고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63쪽).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 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 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 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 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그랬다고 해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128쪽)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란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 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채널예스에 실림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은유칼럼]

“남자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우리 남자들도 알고 보면 돈 버느라 불쌍하거든요.”

 

강연을 마치고 질문 시간에 손을 든 중년 남성이 말했다. 난 강연 내용을 재빨리 복기해보았다. 남자를 밉다고 했나? 그렇지 않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곤란과 불편, 내가 만난 여성들이 당한 폭력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을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남자보다 여자의 불쌍함을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것을 두고 남자에 대한 미움, 투정, 원망으로 받아들이고 그는 동정과 배려를 당부했다.

 

당황한 나머지 난 말을 얼버무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답변 시나리오를 짜보았다. “제가 남자를 미워한다는 느낌은 어떤 대목에서 받으셨어요? 전 여성의 삶을 이야기했거든요. 선생님이 여성이 겪는 아픔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의견)을 질문으로 되묻는 방법. 이 정도가 가장 무난한 대응책이라고 결론지었다. 

 

동시에 이상한 열패감이 들었다. 무작위로 날아드는 어떤 말에도 최대한 공손하고 정확하게 답변하려고 일종의 ‘말하기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은 얼마나 처량한지. 이는 괴팍함, 무뚝뚝함, 거침없음이 남성다움의 전유물로 여겨지듯이 친절함, 보살핌, 포용성을 여성다움의 책무로 익혀온 강박일지도 모른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말하기는 늘 미끄러진다. 부정, 무시, 왜곡당한다.

 

글쓰기 수업에서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할 때 벌어지는 풍경이 있다. 함께 읽은 책의 내용에 공감한 여성 학인들은 자기 이야기를 쏟아낸다. 살면서 억울했던 일, 분했던 일, 기가 막혔던 일... 그러면 남자 학인들의 표정은 조용히 어두워진다. 급기야 “나는 집에서 설거지도 잘하는데 왜 그러느냐”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면 말길이 끊긴다. 분노하는 여성은 우습지만 분노하는 남성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그냥’ 말한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한다. 책의 서사에 자극받아 억압되어 있던 자기 얘기를 꺼낸다.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어, 말의 봇물이 터지고 경험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것뿐이다. 여성의 공적 말하기 기회가 드물기에 여성의 말하기를 듣는 기회도 없다면, ‘그냥’ 듣고 있는 게 남성으로선 어렵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생의 억울함을 터놓는데 잠시의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끼어드는 말은 제 스스로 힘을 잃는다. 

 

한 지역에서 폭력과 존엄을 화두로 강의를 했을 때다. 관객 중 가장 연장자인 남성이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소감을 말했다. “작가님은 살면서 폭력을 당한 적이 많나 봐요?” “폭력을 많이 당한 거 같아서요.” 어순을 바꿔가며 반복했다. 그날 강의의 줄거리는 내가 직간접으로 경험한 폭력의 서사였다. 간첩조작사건피해자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를 쓰면서 알게 된 국가폭력,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자와 글쓰기 수업을 하며 발견한 일상의 폭력, 평소 무심히 사용하는 편견과 차별의 언어 폭력 등등.

 

그건 누구나 예기치 않은 폭력에 노출될 수 있음을 알리는 보고문이면서,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고 무심했던 데 대한 반성문이기도 하고, 폭력을 어떻게 줄여나갈지 같이 모색하자고 촉구하는 선언문이기도 한, 아프고도 조심스러운 말들이었다.

 

질문자의 기습적인 발언은 나를 향하는 듯했지만, 막상 나란 사람이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었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고 이제는 집안일에 솔선하고 아내를 위한다며 자신의 눈을 빼서 주어도 아깝지 않고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악마 같은) 남자만 있는 게 아니라 몸을 던져 희생하고 노력하는 (천사 같은) 남자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듯했다. 

 

이 낯설고 익숙한 상황,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살피기보다 자신을 불쑥 내세우는 남성성의 노출에 난 또 찔렸다. 이번엔 정신을 집중해 말했다. 내 몸을 통과한 폭력의 기억에 대한 가치 폄훼를 바로 잡아야 했다. 당신의 발언은 내가 폭력의 당사자여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용기 내어 자기 아픔을 터놓고 그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감응한 사람들에 대한 결례이자 업신여김이다. 폭력의 피해를 개인의 박복과 불운으로 취급하는 것,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관습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양산하고 방치하는지가 오늘 강의 주제라고 정리해주었다.

 

물론 냉정하고 초연하지 못했다. 맥없이 터진 눈물을 꾹꾹 누르며 말했고 그는 주저 없이 사과했다. 자신이 강의 중간에 들어와서 앞의 이야기를 못 들었고 인문학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서 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량한 눈매를 가진 그의 사과를 의심하진 않지만 그럴수록 그의 언행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의 내용 파악이 어렵고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스스로 말하도록 허락했고 기어코 한 수 가르치려 들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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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

 

“내가 나에 대해서, 그리고 일에만 몰두하는 매정한 남자와 결혼하여 네 아이를 낳고 살면서 분노와 비참함으로 자주 속을 끓였던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한 책을 쓴 뒤였다. 웬 인터뷰어가 혹시 내가 인생의 짝을 찾지 못한 건 학대하는 아버지를 둔 탓이었느냐고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 질문은 내가 인생에서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제멋대로 가정하고 어이없게도 그 인생에 끼어들 권리를 주장하는 질문이었다.”(23쪽)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둔 탓으로 단정하는 저 장면은, 한국사회의 장대한 폭력에 관한 서사를 한 여성의 트라우마로 간단히 환원해버리는 목소리와 겹친다.

 

‘남자도 돈 버느라 힘들다.’ ‘남자도 설거지 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목숨도 던질 수 있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구절절한 말하기는 (여성이 그렇다는 걸 알았다가 아니라) 남자는 이렇다는 걸 알아달라는 한 줄 요약으로 돌아오곤 한다. 이런 반복적인 상황이 나의 역량이나 경험 부족 탓이 아닐까 자책했으나 솔닛의 사례와 연결되자 보편적 젠더 현상으로 확장된다.

 

“남자들은 감정이입의 범위를 넓혀서 다른 젠더와 자신을 동일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 백인은 유색인종과는 달리 다른 인종에 동일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곧 자신만을 볼 뿐 남들은 보지 않는 것이다.”(89쪽)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 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가부장제는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 그 하자와 결함을 체화한 젠더 역할 수행을 윤활유 삼아 굴러간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 
 
난 강연 중 눈물바람이 세 번째다. 두 번은 말하다가 혼자 울컥했다. 더 울어야 할 것이다. 내 나약함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 바꾼다. 울지 않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9쪽)


- 채널예스에 실림


다정한 얼굴을 완성하는 법

[은유칼럼]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외숙모에게 전화가 왔다. 나이 들어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음식 장만이 힘들다며 추석은 쉬고 설날에만 오면 어떻겠냐고 주저주저 운을 뗐다. 그간 매년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외가에 갔었고 숙모는 20인분 가량 친지의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우리 가족을 각별히 챙겼다. 명절상에 특별요리를 더한 상차림이 예순을 넘긴 숙모에겐 고단한 노동이었을 텐데 미리 헤아려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했다.

 

아버지에게 외숙모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숟가락 몇 개 놓는 건데”라며 표정이 어두워진다. 물론 한 끼 밥을 못 먹어 그러시는 게 아닐 것이다. 친지와의 왕래가 줄어드는 명절에 대한 서운함과 사위어가는 인연에 대한 쓸쓸함을 느끼시는 것 같다. 그래도 가족의 화합을 위해 여자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건 문제다. 나는 대식구 밥 차리는 게 간단하지 않다고, 장을 보고 저장하고 재료를 다듬고 썰고 데치고 조리해 차려내는 일이 중노동이라고, 나도 싱크대에 서는 게 힘든데 숙모는 오죽하시겠냐고, 쉬게 해드려야 한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떤 계기에 인식의 다른 지평이 열리기도 한다는 걸 믿기에 최대한 말씀을 드렸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평생 밥 당번’으로 사느라 뼈가 녹는 고충을 당사자들은 제대로 말하지 않았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고통을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는다. 살면서 제대로 배운 적 없지만 살면서 너무도 필요한 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라는 걸 절감하는 나날에, 참고서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어린 나는 엄마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할 수 없었고, 엄마의 내부에서도 무너지고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마음 쓸 수 없었다. (…)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건실한 남편과 크게 속 썩이지 않는 아들딸을 두고도 그럴 수 있다. 그런 걸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려고, 배웠다. 배운 사람은 그런 걸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13쪽)

 

시인 김현이 쓴 『걱정 말고 다녀와』라는 산문집이다. “엄마가 술에 취해 내게 전화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술에 취한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는 낯선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엄마가 되어본 것처럼, 저자는 다른 존재가 가까스로 되어본다. 애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날 보았던 한 남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카페를 환하게 밝히는 어린 연인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오래된 수습사원이 되어본다. 그리고 퀴어퍼레이드에 와서 북치고 고함치며 남의 축제를 방해하는 혐오세력의 입장이 되어본다.

 

“아마도 스스로를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며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도 지친 몸으로 애인을 향해 갔을 것이다. 그는 애인과 뽀뽀했을까.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얼굴로 애인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날 자신이 보낸 ‘혐오의 하루’를 말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뽀뽀하기 위한 하루의 얼굴’을 어디 감히 그런 얼굴 따위가 이길 수 있으랴. 나는 뽀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42쪽)

 

자신을 뽀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혐오세력의 뽀뽀 불가능성을 예측하는 장면은 통쾌하고, 글을 마무리하며 켄 로치 영화 〈다정한 입맞춤〉을 인용하는 대목은 진실의 무게로 묵직하다. 이렇게 김현은 쓴다. 가만히 응시하고 넌지시 되어보는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켄 로치 영화를 막판에 무심하게 곁들이는데, 그것이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절묘하게 본문과 들어맞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부제가 ‘켄 로치에게’다.

 

“그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요청한다. ‘그들의 애인이,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친구가, 그들의 동료가 되어 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들이 되어보세요.’ 이때의 되어보기는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가상체험이면서 동시에 나는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현실 체험이다.”(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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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레쉬


다정함을 아는 얼굴로 스스로를 완성해


『걱정 말고 다녀와』를 완독한 그날 오후, 나는 재킷 소매 기장을 줄이러 수선집에 갔다. 복도를 막아 만든 그 좁은 공간에 60대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데 밥을 안 해줄 수도 없고, 나이 먹으니까 밥하기가 너무너무 싫잖아.” 
“맞아, 어디 가도 밥 때만 되면 맘이 안 편해. 근데 요즘 애들이 결혼을 어디 일찍 하냐고.”
“왜들 결혼은 안 해? 큰일이야 큰일.”

 

듣자하니 주제는 비혼의 과년한 자식과 같이 사는 일의 괴로움에 관한 것이었다. 달달한 믹스 커피가 든 종이컵을 촛불처럼 두 손으로 감싸 쥔 그녀들의 표정은 밥과 돌봄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는 듯 절절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 내 귀는 점점 쫑긋해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외숙모 같고 저자의 엄마 같고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필 책을 읽고 났는데 이런 장면을 목도했네 싶었지만, 엄마들의 저런 한탄과 하소연은 주변에 늘 흘러다녔다. ‘남의 입장이 되어봄’에 관한 책을 마침 읽었기에 내게 생생히 들린 것뿐일 거다.

 

켄 로치의 ‘되어 보기의 망토’가 공용화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밥 먹는 사람이 밥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이때의 밥하기는 여유 있게 놀다가 모처럼 하는 일회성 노동이 아니라 수십 년간 삼시세끼 노동량이 누적된 상태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반복성 노동이며, “견딜 수 없는 기분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감정이 때때로 찾아왔”(13쪽)을 때에도 몸을 일으켜 차려야 하는 모진 노역이다. 숟가락 하나 더 놓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고 입맛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런 찬찬하고 총체적인 되어보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켄 로치의 재현은 많은 경우 본 것을 다시 보라고 요청한다”(36쪽)고 김현은 전한다. 엄마에게서 엄마를 지우고 한 인간으로 다시 보고, “가장 빨리 미화되고 가장 느리게 진상이 밝혀지는 가족에의 환상”(103쪽)을 차분하게 마주하라는 충고다. 무구한 밥에 얽힌 그 잔인을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정함을 아는 얼굴로 스스로를 완성해”(42쪽)갈 수 있으리라. 

 

다가오는 명절을 맞아 아마 넋두리 2탄을 풀어놓고 있을 수선집 아주머니들에게 나는 김현의 다정을 흉내 내어 말해주고 싶다. “걱정 말고 다녀와.” 그리고 후렴구처럼 켄 로치의 명언도 붙여야겠지. “우리는 무엇이든지 가능하고,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외쳐야 합니다.”(50쪽)


* 채널예스에 실림



만국의 싱글레이디스여, 버텨주오!

[은유칼럼]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 뒤에는 으레 ‘어차피 후회할 거면 결혼하는 게 낫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결혼은 누구의 좋음이고 누구의 후회인가, 주체가 생략됐다. 결혼 생활로 덕을 보는 사람이 지어내고 결혼 제도의 유지를 바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으리라 짐작한다. 저 말씀이 효력을 잃어간다. 결혼해서 후회한 사람들, 아마도 여성들이 작성한 후회의 목록이 널리 공유되며 생긴 변화 같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결혼을 이렇게 정리했다. “현대 여성은 결혼하거나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이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고통 받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여성의 입장을 반영한 정확한 현실 진단이다. 후회할 게 빤하면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상식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내게 가끔 고민 상담이 들어온다. 애인이 있고 그 사람이 좋은데, 결혼하고 싶은데 또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며 분열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은 99퍼센트 여성이다. 나는 독립적인 삶을 맛보기도 전인 20대 초반에 결혼했다. 그러니까 조혼이다. 남의 결혼에 대해 합리적인 조언을 건네기엔 구세대이고, 주관적이고, 회한이 너무 많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현대 여성’의 무용담을 간추려 들려준다. 결혼을 이렇게 대응하기도 하더라며.


그들은 결혼의 ‘예고된 인재’를 막기 위해 채비를 단단히 한다. A는 인턴십형이다.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 등 애인의 총체적인 살림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6개월간 자취하게 한 후 결혼했다. 인턴십처럼 예비 심사 기간을 두고 판단한 것. B는 단체협약형이다. 일상 업무 분담은 물론 명절 및 양가 부모 생신 때의 역할과 책임까지 치밀한 세부 규정을 마련하고 조인식 후 결혼했다. C는 일상 돌파형이다. 어느 날 남편에게 아이스크림을 좀 만들어달라고 했단다. 남편이 깜짝 놀라서 “나 그런 거 못 해. 한 번도 안 해봤어”라고 말하길래 “이때까지 내가 했던 음식들 나도 결혼 전엔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다 배워서 하는 거야. 당신도 배워서 만들어줘”라고 요구했다고.


지혜가 샘물처럼 넘치고 용기가 화산처럼 솟구치는 현대 여성들의 처신에 나는 매번 탄복한다. 여성을 가두는 결혼의 울타리 앞에서 주저앉아 눈물짓거나 낙담하기보다 그것을 흔들어대고 뛰어넘기를 시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활달하고 도도한지. 자신에게 맞춤형으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수정 보완해서 활용한다면 결혼이 구속복이 아닌 양날개가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실 ‘조혼자’인 내가 부러움에 몸이 기우는 쪽은 따로 있다. 결혼을 통째로 거부한 위풍당당 싱글레이디스다. 난 아이 키울 때 육아 동지들과 어울렸고, 너도나도 지지고 볶고 사는 조선 여자의 일생을 흉내 내고 반복했을 따름이다. 아이들이 크고 일을 하고부터는 싱글 여성들과 접촉하는 기회와 빈도가 늘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싱글 현대 여성’의 일상은 같은 시대 다른 세계였다.


결혼은 여성의 무덤이 아니라 ‘여성의 일의 무덤’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일찍이 간파한 혜안의 소유자들은 가족 아닌 일에 헌신했다. 일을 통한 성취, 성취에 따른 재력, 그 재력에 따른 쾌락을 누렸다. 가볍게 짐 싸서 마실 가듯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맛있는 요리를 해먹이고, 늦도록 술을 마셔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엄마 언제 오냐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40대 여성의 핸드폰은 정물처럼 고요했다. 


그들은 자기 몸에 대해서도 “신체적 자주권”(338쪽)을 행사했다. 수많은 복락 중에서도 싱글 여성의 독보권(獨步權)은 정말이지 훔치고 싶었다. 난 내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지 왜, 언제부터 좋아하지 않았는지 몰랐는데 그들을 보며 알았다. 감옥에서 면회, 운동, 목욕 등을 위해 이동할 때 반드시 교도관과 동행해야 하는 재소자처럼, 나도 양육 기간 내내 독보권이 없었다. 그런 내게 여행이란 자식과의 동행을 뜻했고 그건 현실의 탈출이 아닌 일상의 연장이었다. 아이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본 바다는 낭만의 공간이 아니라 위험한 장소일 뿐이다. 여행이 들뜨고 설레긴 하지만 홀가분 하진 않으니 차라리 집에서 책이나 보는 게 속편한 것이다.

 


결혼과 출산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러나 결혼과 출산, 혹은 결혼과 출산을 배제한 삶에 대한 나의 무지는 통한스럽다.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는 언제나 부족하고 편파적이었다. 그래서 『싱글 레이디스』가 가뭄의 단비처럼 다가왔다. “아무리 절실하게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해도 그들은 끔찍한 결혼이 주는 잠재적 불행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자신만의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408쪽)고 이야기하는 이 책은, 100여 명의 싱글 여성 인터뷰와 여성 학자들 이론을 토대로 싱글 여성의 삶을 통합적으로 소개한다. 

 

싱글 여성의 역사부터 도시, 자립, 우정, 일, 돈, 섹스, 가난, 사랑과 결혼, 아이 등 세부 항목을 짚어가며 육성과 이론을 근거로 싱글 생활의 대소사를 풀어낸다.


“혼자서 생활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된다. (...) 당신이 직접 해낸 일들이 당신을 지탱해 주기에 나약한 아내가 될 필요가 없다.”(372쪽) 이런 대목은 자유로운 여행과 섹스가 가능한 생활로 정도로 축소되곤 하는 싱글 여성의 진짜 삶과 힘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싱글로 지내면서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웠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어요. 우리는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는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394쪽) 인간에게 독보권이 주어져야 한다면 바로 이것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내가 어디에 맞는 사람인지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하나씩 직접 생각하고 부딪치면서 알아가”(363쪽)는 게 중요하니까. 자기 인식에 이르고, 자기 배려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말이다.


결혼이 존재의 표지이자 기준이던 때는 저물고 있다. 기혼이든 비혼이든 자립적인 1인 여성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가 아니라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정도로 여성이 자유를 구가하는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고 버티는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저자는 귀띔한다.


순수한 사랑의 판타지에 눈이 멀어 냉큼 결혼해버린 조혼자인 나는 만국의 싱글 레이디스에게 염치없이 부탁하고 싶어진다. 내 몫까지 버텨주오! 만약 결혼한다면 말해주오. “내가 결국 행복하게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행복하게 싱글로 살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410쪽)이라고.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 왜 살수록 빚쟁이가 되는가

[은유칼럼]


“왜 목동 아파트를 고집하느냐” “좁아터진 집에서 사느니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넓게 산다” “공부할 애들은 학원 안 보내도 공부한다”…. 내가 목동아파트에서 가장 작은 평수에 사는 동안 귀가 따갑게 들었던 충고다.


신혼 때 남편의 지점 발령으로 목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단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10층이었다. 몇 해 사이 백화점과 방송국이 들어서고 주상복합 시설과 고층빌딩이 앞다퉈 생겼다. 건물 안은 학원과 부동산으로 신속하게 채워졌다. ‘전문가 집단’ ‘물꼬터 학원’ ‘열정과 끈기’ ‘자기주도학습센터’ 등등 자고 나면 학원 간판이 내걸렸다. 내가 학원 천국 목동으로 이사를 간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학원들이 난입한 거다. 


그 즈음 난 20평 아파트 세입자가 됐다. 단지 안 가장 좁은 평수 맨 위층 복도 끝 집을 겨우 구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4인 가족이 살기엔 비좁았다. 그래도 이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교육이 아니라 양육 때문에. 목동은 내게 학원이 많은 곳이 아니라 급할 때 아이를 부탁할 ‘언니들’이 많은 동네였다. 그 ‘언니들’은 남편 말고 육아 대체자가 없는 워킹맘에겐 동아줄이다. 육아 난민이 되느니 목동 빈민을 택했다.


 가끔 만나는 친척이나 지인들은 주저 없었다. 아이가 둘 있고 집이 목동이라고 하면 사교육 때문에 목동에 사는구나 자동으로 연상했다. 대개의 판단은 자기 정념과 욕망에 근거하는 법. 현실은 달랐다. 서울·경기 서남부권에서 세단을 몰고 와 아이들을 들여보내는 소위 이름난 학원과 족집게 강사를 집 앞에 두고 구경만 했다. 입시생이라고 해주는 것도 없는데 친구들과 생이별까지 시키기 미안해서 큰애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20년 살던 나의 고향 목동을 등졌다.


목포에 취재 갔을 때다. 여느 도시처럼 아파트가 밀집한 신도시가 생겨났고 구도심도 재개발 위기에 처했다. 구도심에는 가장 취약한 계층인 어르신들만 남았다. 이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가 말했다. 어르신들이 새로운 동네에 정착하려면 김치도 담가 이웃과 나누고 마실도 다니고 해야 한다, 그런데 노인네라서 음식 할 기력도 없고 관절도 성치 않고 귀도 안 들린다, 재개발이 시행돼 어르신들이 이 동네를 떠나면 살기 힘들 거라고 우려했다. 어르신들이 ‘살던 데서 살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에는 가난한 대학생의 속사정이 소상히 나온다. 독립연구자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 “통장잔고는 늘 10만원을 넘지 못했”(9쪽)던 저자가 대학원까지 학자금 대출금 2200만 원을 받은 경험을 토대로 ‘대학생은 어떻게 채무자가 되는지’ 구조적으로 밝혀낸다. 이 책은 내가 무심코 가졌던 청년․공부․가난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게 했다.


“끼니는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 절약할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세미나 뒤풀이 모임에 빠지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15쪽)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경우, 메뉴와 가격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195쪽)


‘우리 때’와 달리 혼밥이 왜 그리 유행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요즘 청년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스펙 관리만 하느라 밥도 혼자 먹고 깍쟁이처럼 뒤풀이도 안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500원 1000원이 고민거리가 되는 “굶주림이 익숙해진 삶”을 채무자-대학생은 피할 수 없었다. “밥 한 끼에 마음 졸이며 눈치를 보는 삶 속에서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서 스스로 단속하며 살아간다.”(196쪽)


또 다른 편견들. 가난한데 대학원을 왜 굳이 가려고 할까, 했다가 저자처럼 공부가 너무 재밌고 평생 하고 싶은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공부할까를 묻게 됐다. 학자금 대출 받지 말고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각 장학금마다 요구하는 ‘인재’상에 맞춰 “가난소개서”(99쪽)를 써야 한다며 “장학금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가난을 강제적으로 발화하게 하는 것은 특정 계층에 대한 낙인화이자 폭력”(102쪽)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의 큰애도 대학에 가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아이의 표정이 얄궂었다. 장학금 종류마다 이름이 다르단다. 기준 학점 이상에, 부모 소득 분위 하위권 학생에게 지급되는 ◯◯◯ 장학금을 받았으니 그 사실 하나로 자기 처지가 만천하에 공개됐다는 거다.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틀에 박힌 말로 위로했는데 저자는 나은 답을 들려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부끄러운 것이다.”(102쪽)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 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 없다. 설명도 간단치 않다. 저자처럼 수년을 공부하고 책 한권 분량의 구조적 분석을 마쳐야 제대로 이해시킬까 말까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건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당한”(189쪽)이들은 말이 없다. 특정 지역이 사교육 시키기 좋다는 말. 사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기득권층이 된 이들의 언어일 것이다. 사교육에 실패했거나 애초에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의 말은 배제됐다. 재개발이 지역 발전에 좋다는 말도 마찬가지. 매매차익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과 그것을 조장한 토건재벌의 말이다. 쫓겨난 원주민의 말은 무음 처리다.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생산–유통 된다. 


나는 목동 아파트를 떠나 집을 구하며 주택담보대출이란 것을 받았다. 용쓰고 살았으나 살다보니 중년에 빚쟁이다. 20년 상환의 굴레에 갇혀 죽지도 못할 처지가 된 게 황망하고 서글펐는데 이 책에서 부채에 관한 다른 해석을 얻었다. “개인이 가난해서 빚을 지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빚을 지는 것이다.”(105쪽) 학생-채무자의 글에 노동자-채무자인 나는 위안을 받는다.



*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 인공자궁을 생각함

[은유칼럼]

        “저 엄마 왜 울어?” 

        “몰라. 아까부터 울더라.”


간호사들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멀어진다. 새벽 4시 32분 아이를 낳고 나는 분만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예닐곱 시간 산통 끝에 몸통은 거죽만 남은 듯 너덜너덜했다. 혀가 껄끄러워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는데 노란 모래 가루 같은 입자가 묻어나왔다. 물 좀 달랬더니 간호사가 적신 거즈를 준다. 그걸 입술에 대고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무슨 스위치를 켠 것처럼 느닷없고 하염없이. 흐느낌도 통곡도 아닌 조용한 눈물의 방류를 간호사들이 본 모양이다.


이렇게 아픈데 엄마는 오빠를 낳고 어떻게 나를 또 낳았을까. 첫 아이 출산 때 정신이 돌아오고 처음 든 생각이다. 몸을 초과하는 통증에 몸서리쳤다. 그래 놓고 나는 또 둘째를 낳은 것이다. 동이 트자마자 남편이 양가에 전화를 드렸고, 엄마는 아침 7시 병실 문을 열고 뛰듯이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실룩거리던 엄마. 왈칵 눈물을 쏟으며 말한다. “고생했다. 애 낳는 게 얼마나 아픈데…”


삼칠일이 지나 산후도우미 아주머니가 가고 남편은 회사 일로 바쁘고 혼자 남겨졌다. 밤낮으로 두 아이 사이를 오가며 쩔쩔매던 어느 날, 아이를 재워놓고 방문을 닫는데 아이가 뒤척였다. 다시 토닥토닥하고 재우면 또 깨고 그러길 수차례. ‘잘 자라 우리 아가’를 입으로는 흥얼흥얼 등을 두드려주는데, 빨리 자라 좀 제발 하면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짝을 세게 한 번 내리쳤다. 손바닥에 꽉 차는 조그만 등의 느낌. 후끈했다. 그런 난폭함이 내 몸 어디에서 나왔는지 놀랐고 더 놀란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는 분유도 이유식도 거부했다. 끼니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제발 한 입만 먹어라, 제발. 애원은 분노로 바뀌었다. 나는 분노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벽에 던졌다. 아기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모든 게 지옥이었다.” 

한 여성이 산후우울증을 호되게 앓았던 경험을 글쓰기 수업에서 발표했다. 저 대목에서 멈칫,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래 전 화의 기운이 나를 덮쳤다. 행여나 들킬세라 과제물에 시선을 두었다. 낭독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더니 세상에나,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휴지를 꺼내 코를 푼다. 각기 다른 연령 대 여성들이 운다. 침묵을 깨고 한 명이 말문을 열었다. “남들은 척척 해내는 육아가 나는 왜 이렇게나 힘이 들까.” 이 문장이 특히 공감이 간다고, “그 말을 저는 남편에게 들었어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가는 길, 이 집단적 슬픔의 광경이 떨쳐지지 않았다. 지금도 육아의 고통을 자신의 모성 부족으로 탓하며 속울음 삼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 안의 폭력 성향이 불쑥 나타날 때 어떻게 잠재울까. 문득 엄마들을 모아서 ‘봉기蜂起’를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충동적으로 페이스북에 봉기 단상을 올렸고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토록 고된 육아를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수행한 선배 엄마들에 대한 원망, 육아로 인한 일상의 압박과 인격의 왜곡에 대한 토로가 족자처럼 펼쳐지는 와중에 한 줄 의견이 외롭게 버티고 있었다. ‘저도 봉기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내가 구상하는 봉기는 단순하다. 벌떼처럼 모여서 윙윙윙 떠들기다. 자기 공격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니, 내 목소리를 내보내고 내 삶에 다른 목소리가 흘러들게 하는 것이다. 육아의 기쁨만큼이나 슬픔을, 어린 생명이 주는 충만함만큼이나 자멸감을 저마다 말하기만 해도 자신이 비정상이 아님을 알고 적어도 자기 억압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나는 또 엄마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을 펼쳐서 읽어주고 싶다. 그간 젠더 불평등은 근원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난 회의적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깨인 남자, 페미니스트 배우자를 만나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임신과 출산이 이뤄지는 한 양육에 따른 최종 책임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여자에게 귀속되더라는 것이다. 여자의 몸이 무거워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삶도 무거워진다. 비출산 경향도 그걸 인지한 여성들의 선택일 거다. 이에 대한 여성의 구제 방안을 『성의 변증법』 이 제시한다.


“남자는 땀 흘려 일하고 여자는 고통과 산고를 참아야 하는 이중 저주는 처음으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해소될 것이다.”(292쪽) 저자가 말하는 테크놀로지는 인공 생식의 완전한 발달을 뜻한다. 즉, 인공 자궁에서 태아를 잉태함으로써 남성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지도록 하자며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하여 여성을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양육의 역할을 여성뿐 아니라 남성, 즉 사회 전체로 확산시킬 것.”(294쪽)을 요구한다.


스물다섯 살의 저자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이 급진적 주장에 처음엔 놀랐지만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시험관 아기처럼 인공 자궁을 통한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인류의 반이 그들 모두의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한다”(293쪽)는 것에 근본적인 회의와 물음을 던진 점, 피임법이 개발되기 전 계속되는 출산으로 여성들이 끊임없는 부인병, 조로, 죽음을 겪는 현실의 단절을 꾀한 점, 온갖 지력과 상상력을 동원해 대안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귀하게 다가온다.


         『성의 변증법』은 1970년에 발간됐다. 40년이 흐른 지금, 남성 양육 역할 확대는 남성 육아휴직제로 논의, 실천되고 있으니 파이어스톤의 ‘혁명적 요구’가 비현실적인 대안이라고만 일축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고정 불변의 현실로 여기지 않고 다른 삶을 그려보는 태도를 배웠다.


가끔 생각난다. 분만실 침대 위에서 천장의 사나운 형광등 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물짓던 내 모습이. 귓속에 흘러들던 미지근한 눈물이. 무에 그리 서러웠을까. 애 낳은 게 뭐 대수라고 ‘저 엄마는 왜’ 눈물 한 바가지 흘리는지 나도 잘 몰라서 더 서글펐다. 그런 내게 “임신은 야만적이다. (…) 임신은 종을 위하여 개인의 육체가 임시로 기형이 되는 것이다”(287쪽)라는 말, 자연분만의 신화화를 비판하는 문장은 구원 같았다.


그날 나는 여자의 몸에서 발생하는 고통,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외로운 노동을 딸에게 고스란히 대물림한다는 사실이 아득하고 미안했던 것 같다. 엄마가 몸을 푼 나를 보자마자 울었듯이 나 역시 막 탯줄 끊어낸 딸에게 본능적으로 눈물을 바친 게 아닌가 싶다. ‘생식의 기계화’를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언어가 내 초라한 눈물의 이유를 밝혀주었다. 그러니 점점이 흩어져 홀로 고행하던 여성들의 입술이 말할 때,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공유할 때, ‘고통의 언어화’로 자기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엄마들의 봉기는 인공자궁에 버금가는 혁명이 되지 않을까 나는 상상한다.




-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에 실림 

 


채널예스 - 하찮은 만남들에 대한 예의

[은유칼럼]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초봄 꽃샘바람이 사정없이 볼을 때리니 견디지 못해 올라탔다. 중간에 환승할 심산으로 옷에 붙은 바람을 털며 통로 안쪽에 자리를 잡던 중, 한 사람과 시선이 얽혔다. K? 어! 여기 웬일이냐며 우린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눅였다. 우연한 상봉, 물러설 곳 없는 마주침, 기승전결의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어정쩡한 시공간. 이 불리한 조건의 만남이란 강제된 소개팅처럼 어색하다.

 

“저 이 버스 백 년 만에 탔어요.” “저도 거의 안 타는 버스인 걸요.” 어머 이럴 수가.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영화 한 편 봤어요.” “무슨 영화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좋나요?” “네. 초반엔 좀 졸다가 울면서 봤네요.” “어디서 오는 길이세요?” “서촌에 미팅이 있어서요.” “그랬구나. 아직 거기 살죠?” “작업실 냈어요.” “와, 번성하네요.” “간간이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 이번에 작업한 거 좋던데요.”

 

K는 디자이너다. 5년 전 작은 잡지를 만들 때 같이 일했다. 편집주간까지 뭉쳐 낮밤으로 술 마시고 말을 나눴다. 흥이 잘 통했다. K는 젠틀하고 익살맞다. 엉뚱하고 단정하다. 색깔이 다른 양말을 신되 셔츠의 단추는 반드시 목 끝까지 채웠다. 남자 사람이지만 자기 얘기를 앞다투어 꺼내지 않았으며, 가만히 듣다가 한 번씩 재치 있는 대사를 쳤다. 섬세한 개인주의자인 K는 좋은 동료였다. 일하기에도 놀기에도. 가끔 보고 싶었지만 굳이 연락은 하지 않고 그리운 대로 흘려보낸 지 어언 2,3년이다.

 

버스에 대롱대롱 매달린 K와 나. 말의 시속이 30킬로미터를 넘지 않는 대화가 끊기다 이어지다 했다. K가 입을 뗐다. “영화 보고 나서 눈물까지 흘리셨잖아요, 조용히 감동을 안고 가야 하는데 제가 괜히 방해한 거 아니에요.” 두 눈을 껌뻑이며 미안함을 표하는 K는 여전했다. 난 손사래를 치고 고개까지 흔들었다. 선의도 호의도 없이 우린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탄 것뿐이다. 게다가 난 극장을 나와 카페에 들러 비엔나커피 한 잔 마시고 오는 길이었다. 영화를 음미했으니 괜찮다고 했다. K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제 역할이 끝난 연극배우처럼.

 

이 짧은 해후가 삼삼했다. 우연히 만난 이들의 모범 답안 같은 그것. 버스 장면을 몇 번 돌려봤다.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하지 않아서 좋았다. 흔해 빠진 관용구로 인연을 복제하는 건 시시하니까. 자기가 나의 고요를 침탈한 거 아니냐고 물어봐주어 고마웠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말씨는 다정하니까. 기억에 검은 발자국만 남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음에 또 만났을 때 싫음이 올라오면 곤란하니까.

 

예정된 후배의 결혼식에 갔다. 재작년 다른 결혼식에서 만났던 후배의 동기들 서넛이 보인다. 그중에 Y도 있다. 지난 번에 이혼 의사를 내비쳤던 Y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궁금한데도 연락 한번 안 하는 일이 살다보니 가능해지고 있다. 어쩐지 미안해서 직접 묻지 않고 옆에 있던 C에게 넌지시 물었다. 귀에 대고 손으로 막고 소곤소곤. “Y말야, 이혼했어?” C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때 했지” 한다. 그러더니 잠시 후 저쪽에서 다가오는 Y에게 말한다. “언니가 모르고 있어서 네 소식 업데이트 해드렸다.”

 

순간 난 뒷담화하다가 들킨 사람 마냥 저 혼자 무안했다. Y는 결혼하든 이혼하든 슬기롭고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갈 여성이지만 그렇다고 이혼이 비옷에 묻은 빗방울 털 듯 간단한 문제는 아니니까, 말 꺼내는 자체가 아직 괴로울 수도 있으니까, 여기는 결혼식장이고 난 교양인이니까 조용히 말한 건데 나 빼고 아무도 조심하지 않았다. 신여성들 사이에서 나만 동그마니 구여성이다.

 

그 어중간한 만남, 결혼식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평소 ‘결혼은 행복, 이혼은 불행’이란 관습적 사고의 척결을 주장했다. 결혼식은 일생의 화창한 하루일 뿐 평생의 맑음을 보장하는 의례는 아니고 이혼은 비감한 일이지만 앞날의 불행을 예비하는 생의 절차는 아니다. 비 오는 날도 해 뜨는 날도 그냥 날씨인데 인간의 관점에서 좋은 날씨 궂은 날씨 구별한다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삶의 어떤 국면을 좋음과 나쁨으로 가르는 것도 지극히 관습적이고 현재중심적인 판단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결혼은 축하로 이혼은 염려로 몸이 자동 반응한 것이다. 앎은 몸을 이기지 못한다.

 


일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내 고민과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우리는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지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축복한다. 결국 여기에는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진 일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세상 일반에 행복한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전제로 깔려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 어법, 축복의 방식은 동시에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든가, 아니면 적어도 이 두 사람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를 필연적으로 띠고 만다.”(111쪽)

 

저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한다는 것 자체가 독신이나 동성애자에게는 저주가 된다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규범을 모조리 갖다 버려야 한다. 규범이란 반드시 그것에 의해 배제 당하는 사람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112쪽)라고 일갈한다. 뭔가 후련했다. 좋음과 나쁨의 전복이 아닌 규범의 용도 폐기. 누구도 소외되지 않으니 배려도 필요치 않은 상태. 누가 결혼했든 이혼했든 합격했든 실직했든 발병했든 서툰 연극 배우처럼 구는 짓은 이제 그만이다.

 

나이 들면서 체지방이 늘 듯 안 쓰는 핸드폰 번호가 쌓인다. 번호는 정리해도 인연은 삭제되지 않고 내가 피해도 삶이 만나게 한다. 사는 동안 운명을 뒤바꿔놓을 결정적인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 않겠지만 신상 정보의 업데이트가 안 된 지인들과의 애매한 만남, 아니 마주침은 종종 일어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은 (…)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116쪽)

 

이 단편적 만남, 하찮은 우연에 잘 임하고 싶다. 안색을 살피고 고요를 챙길 것. 앞으로 수 차례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무수한 대중교통의 탑승 기회가 남았다.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

[은유칼럼]

“맞벌이 하시죠? 수레는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 담임에게 전화가 왔다. 학부모가 되고부터 핸드폰 액정에 학교 전화번호만 떠도 가슴이 철렁한다. 학교는 어쩐지 불길의 정조를 몰고 온다. 담임의 부름을 받고 불안을 안고 몇 시간 후 빈 교실에 마주 앉았을 때, 담임은 물었고 나는 순간 깜깜했다. 뭐든지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말할 게 없었다. 월수금 영어학원 간다고 둘러댔지만 고작 한 시간 반. 끝나면 아이는 또 무얼 할까.

 

상담 중 담임이 말했다. 지난주 과학 시험을 보았고 아이는 점수가 낮았고 남자애들 몇 명이 놀렸고 아이가 울었다. 수레가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삭이는 편이다. 혼자 있을 때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 같다. 일기에 ‘정주행’한 드라마 이야기를 쓰는데 줄거리 요약을 제법 잘한다고 했다. 집에서 아이를 세심하게 살피라는 당부와 함께 상담이 끝났다.

 

그날도 이런 날씨였다. 교정을 빠져나오며 올려다본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노랗고 바람은 시렸다. 세상과 내가, 나와 아이가 분리된 느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운동장 끝에서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담임과의 상담은 아이를 아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를 아는 자리였다.


수레는 둘째다. 첫 아이 때는 교과서 육아로 임하느라 ‘9개월 이후는 물젖’ 이론에 입각해 만 9개월 되는 날 모유에서 분유로 갈아탔다. 지나고서 후회했다. 더 먹일걸. 그래서 둘째는 마냥 먹였다. 젖이 텅텅 비어 쭈글쭈글해지도록 대여섯 살까지 물렸다. 몸으로 연결된 관계는 각별했다. 내가 울면 아이의 눈에도 눈물이 찼다. 아이는 유능한 기상관처럼 내 표정 변화를 감지해 기분을 맞췄다. 그런데 난 밥만 제때 먹이는 것만으로도 허덕였고, 아이의 감정은 헤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스스로 모성을 맹신하는 사이 아이는 열세 살이 됐다.

 

그날 밤 아이에게 학교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대개 아이들이 그렇듯 겉으론 태연했다. 남자애들이 놀린 건 사실이지만 사과했고 다 끝난 일이라며 말꼬리를 잘랐다. 왜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엄마는 무조건 걱정만 하잖아” 한다. 엄마한테 말해봤자 문제 해결에 도움은 안 되고 ‘엄마의 걱정’을 해소시켜줘야 하는 문제까지 추가되는 구조를, 아이는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맥없이 울었다. 자책과 회한과 연민이겠지. 아이의 슬픔을 알아보지 못한 게 미안하고, 품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거 같아 섭섭하고, 밤이고 낮이고 일하느라 뒷등만 보여준 게 면목 없고, 무엇보다 아이의 몸에 고통을 견디는 회로가 깔린 게 안쓰러웠다. 흘깃 쳐다본 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고통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눈물은 공유하는 우리. 그런데 아이는 왜 울었을까.

 

돌이켜보니, 난 딸이랑 닮았다. 나도 엄마를 좋아했지만 엄마에게 비밀이 많았다. 인생 고민은 막판까지 숨겼다. 고등학교 때 담임한테 말대꾸하다가 뺨 맞고 조퇴한 일을 엄마는 모르고 내가 모범생에 순둥이인 줄만 안다. 스물한 살 노조 상근을 결정했을 때도 출근 전날에야 실토했다. 말하는데 눈물이 마냥 흘렀다. 노조 활동 하는 거보다 이유 없이 운다고 혼났다. 도대체 왜 우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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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가오는 것들>에도 모녀 사이 눈물의 강이 흐른다.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딸은 출산 후 몸조리를 하다가 침대에서 느닷없이 운다. 엄마는 왜 우느냐며 이런저런 이유를 캐묻지만 딸은 말없이 울기만 한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테마가 녹아든, 내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딸과 엄마는 서로에게 멀고도 가까운 타인이다. 주변의 동성애자 친구들도 엄마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을 마지막 과제로 남겨둔다. 성폭력 피해 경험을 엄마에게 말하는 딸은 드물다. 돌싱녀 친구들은 이혼 서류에 도장 찍고 나서 엄마에게 통보한다. 그건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효심과 자신의 감정노동을 최소화하려는 계산이 포함된 고도의 협상이다. 덜 진실한 태도는 아니다. 자식의 정체성 투쟁에서 엄마가 최후의 관문인 건 분명해 보인다.

 

그 봄날 상담 이후, 나는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에서 일찌감치 퇴각했다. 모녀관계에서의 무능을 인정했다. 아이도 내게 자주 상기시킨다. 수레는 요즘은 방과 후 집에서 고양이 무지와 노는 것으로 소일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난 무지가 너무 좋아. 잘 놀아주고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잖아.” 이것은 언중유골. 그러니까 고양이와 달리 (엄마) 사람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뜻이다. 난 잔소리 안 하는 엄마라고 자부했는데 아이 입장에선 아닌가 보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157쪽) 구원은 과거에 있다. 엄마가 되면서 상실한 아이 적 감각을 복원하기. 이를 위해 엄마가 쓴 자식 양육서를 읽느니 딸이 쓴 엄마 이야기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작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앞부분에 나오는 엄마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귀했다. 사실 딸의 금발과 눈썹을 질투하는 엄마는 보편적이지 않다. 전래동화 캐릭터처럼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기심이라는 “하나의 감정을 이성적 명분으로 바꾸고 명분을 사실로 바꾸는”(36쪽) 어머니, “내 삶에 분노를 쏟아내는”(41쪽) “나를 단 한번도 알아보지 못한”(43쪽) 필자의 어머니는 내 모습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종종 딸을 향한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기정 사실로 왜곡할 때가 있고, 나의 풀리지 않는 화를 아이에게 퍼붓기도 한다, 보고 싶은 면만 초점을 맞추니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연구 대상’ 엄마를 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딸의 지적 여정을 함께 하고 난 후, 나의 꿈은 정교해졌다. 자기가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지 않는 엄마 되기, 아이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수시로 그려보기. 그저 고양이처럼 말없이 아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http://m.ch.yes24.com/Article/View/32972

* 이 글은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에 실렸습니다. 

[채널예스] 예스24 직원이 뽑은 '올해의 저자'

[글쓰기의 최전선]


누군가에게 내가 '올해의 저자'라는 사실이 낯설고 멋쩍다. 근데 쫌 자랑하고 싶다. 야단스럽지 않게. 국내 내로라 하는 저자는 다 만나고 다니는 분이 나를 택해주다니 으쓱한 거다. 이상한 얘기지만, 무명 작가인 내 책을 '굳이' 읽는 독자들에 대한 신뢰가 나는 있다. 드물게 '발굴 독서'를 하는 분들이니까. 새해에 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송구영신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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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책’을 통해 글자를 읽지만, 동시에 저자를 읽는다. 사람이 없으면 글자도 없고 문장도 없고 책도 없다. 좋은 책이 만들어지면 우선 저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스24 직원들에게 물었다. “올해, 당신이 만난 최고의 저자는 누구였습니까?”, “후속작을 기대하는 저자가 있습니까?” 독자 10명이 저자 10명을 꼽았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전작주의자가 될지도 모른다. 

 

 

장강명
조선영(도서1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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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저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장강명 작가의 이름을 말하겠다. 10년이나 기자 생활을 하다가 전업 작가로 변신한 이력도 흥미로운데다, 낸 책들도 흥미롭다. 문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 소설에 취재를 바탕으로 한 서사가 강한 작가가 많아졌음 좋겠고, 또한 그런 작가가 책을 자주 썼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는 나로선 그의 작품과 행보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이 작가에게 흥미를 느끼는 데에는 비슷한 연령-비슷한 시공간에서 활동한 이력-비슷한 것을 보고 자란 이력에서 오는 개인적 이유도 있다. 인상적이었던 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강연장(예스24 소설학교)에서 독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던 장면! 개인적으론 올해 낸 책 중엔 『댓글 부대』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존 버거
김유리(뉴미디어팀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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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나는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특별한 일이었다. 왜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서점직원인 나에게 책 추천하는 지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고르고 서점에서 산 책을 선물 받은 적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그 책의 제목은 『A가 X에게』. 대학시절, 사진, 그리고 관점으로서의 이해를 배울 때, 페이퍼 속에서 많이 오고 갔던 저자로 기억하는 존 버거가 쓴 소설이었다. 2009년도에 나온 책을 6년이 흐른 2015년에 읽고, 냉큼 '올해의 저자' 타이틀을 준 것은 그만큼 내게 큰 울림을 준 까닭이었다. 그 뒤로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킹』과 같은 그의 소설은 물론이고 『사진의 이해』 등 그의 저술도 챙겨 읽었다. 한 권 한 권 모두 즐거운 체험이었다. 한 저자를 통해 이토록 다채롭고 넓은 세계를 보고 따듯하게 무언가를 써내려 갈 수 있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쓴 저자를 대면하는 일. 지난 여름, 어쩌면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지나왔을 수도.


 

프레드릭 배크만
김성광(문학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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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서취향은 보통 베스트셀러와 거리가 있는데, 올해는 좀 달랐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는 2015년 가장 사랑 받은 소설이면서, 나를 가장 만족시킨 소설이기도 했다. 인터뷰 기사에서 본 프레드릭 배크만은 콧볼이 좁았고, 앙다문 입 때문에 턱주름도 깊었다. 고집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눈을 빛내며 카메라를 주시하는 모습과 한쪽으로 살짝 처진 입꼬리가 장난스러워 보였다. 『오베라는 남자』의 까칠한 캐릭터와 유쾌한 유머는 그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오베라는 남자』는 굉장히 넓은 범주의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소설이면서도 유사한 독자층의 소설들보다 좀 더 특별한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한 시대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가 (내 기준에는) 맞춤한 비율로 잘 안배되어 있는 느낌이었고, 휘황찬란하고 그 자체로 코믹한 소재가 아니라 조그만 동네 한 켠에서만 일어나는 에피소드들로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특별했다. 이것이 작가의 스킬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아직은 판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다음 행보가 굉장히 기대된다. 배크만의 후속작을 내년 봄에는 만날 수 있다고 하니, 아마 그때는 이 작가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서유미
손민규(뉴미디어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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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좋아하는 소설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은 국적 가리지 않고 좋아하지만, 점점 한국 소설을 더 많이 읽는다. 번역된 글을 읽어야 해서 외국 소설을 꺼리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재나 주제 의식이 한국 소설만큼 나와 밀접한 이야기가 없어서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한국 소설을 즐겨 읽은 건 아니고,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다. 전역하고 시간이 좀 뜨기도 했고, 함께 놀 친구도 없었으며, 취미 생활 할 돈도 없었던 시절 도서관에 즐겨 갔다. 이런 저런 책을 읽다 발견한 작품이 『쿨하게 한걸음』과 『판타스틱 개미 지옥』이었다. 한국 소설이 이렇게도 재밌다니! 그 이후로 서유미 작가의 팬이 되었다. 그 뒤로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올해에는 『끝의 시작』과 『틈』 두 편을 냈다. 그런 면에서 2015년 적어도 내게는 서유미 작가의 해였다.


 

비비안 마이어
최지혜(역사,예술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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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던 비비안 마이어. 올 한 해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사람이다. 필름을 보관했던 창고의 임대료를 낼 돈이 없어 사후 경매로 필름이 거래가 되는데, 그 필름을 샀던 존 말루프가 우연히 사진을 인화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그녀는 유명 인사가 된다. 1950년대에 찍은 사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사진들 235점이 소개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조작된 설정 사진이 넘쳐나는 요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사진을 찍었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를 다시 읽는다. 


 

도나 타트
김미선(도서2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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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방울새』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출판사에서 책 홍보문구로 자랑스럽게 쓴 '완독률 98.5%'는 처음부터 눈에 거슬렸다. 무슨 기준으로? 누굴 대상으로? 측정은 어떻게?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천 페이지가 넘는 책' 이라는 부담감 때문 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98.5%의 진실을 내가 확인해내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올해 안에는 기필코)으로 책을 펼쳐 들었고, 난 빠져들었다. 작가 도나 타트는 발자크의 열혈 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등장인물의 심리와 배경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쯤 이야기는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미술관 폭탄 테러로 엄마를 잃은 시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자책과 그의 운명을 지배하게 된 명화 <황금방울새>. 소년의 삶은 위태로움과 안도감, 행복과 슬픔, 상실과 충만함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독자들을 책 속으로 흡입한다. 게다가 2권 말미에서 밝혀지는 반전이라니. 이 반전은 완독률 98.5%의 일등공신이 아닐까 싶다.


 

은유
엄지혜(뉴미디어팀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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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저자의 전작(『올드걸의 시집』)을 찾아 읽었다. 은유 작가가 나의 '올해의 저자'인 이유다. 글쓰기에 관한 책은 대체로 재미가 없다. 아는 내용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하나, 『글쓰기의 최전선』은 달랐다. 이론은 없고 체험이 있는 신기한 책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목적 없는 글쓰기'로 지을까도 생각했다. '목적 없음에서 드러나는 쓸모 없음의 쓸모'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최전선이란 무엇인가, 삶이 아닌가. 삶과 동떨어진 글쓰기란 존재할 수 있는가?' 책을 읽으며, 곱씹었다. 책만 좋았다면 '올해의 저자'로 뽑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본 저자는 사회와 유리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티브 젠킨스
김규영(유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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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과학이 싫었다. 내 성향을 정확히 파악한 엄마는 과학 백과사전 세트를 거금을 들여 구입한 후 억지로 읽혔지만, 여전히 지루했다. 내용은 어렵고 하품이 났다. 그런데 연말에 만난 『동물 아트 그림책을 보니, 어릴 때 이런 책을 만났으면 좀 달라졌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브 젠킨스는 여러 질감의 종이를 찢고 자르고 붙여서 동물 300여 마리를 만들었다. 그래픽인 줄 알았는데 종이로 하나하나 만든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다시 눈비비고 살펴보니 정말 그림마다 종이의 거친 질감이 동물의 털이 솟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항상 자신의 그림 재료가 되는 새로운 종이를 수집한다고 한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일 텐데, 신기할 따름이다. 나처럼 과학이라면 일단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아이들이 있다면 이 작가를 추천해 주고 싶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작업 방식도 소개하는데 참 손이 많이 가고 꼼꼼한 작업을 하는구나 싶어 새삼 존경스럽다. 이래서 그동안 칼데곳 아너 상, 보스턴 혼북 상 등을 수상한 걸까? 상 받았다고 다 훌륭한 작가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좀더 신뢰가 가는 건 사실이니까.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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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선
김도훈(인문사회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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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벌고 잘 살기』,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사소한 평범함마저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라 그런가 보다. 저자 김진선은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외친다. 모두가 다 이것만이 현실이라고 생각할 때,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다른 현실을 꿈꾸며 그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덕분에 '애쓰지 않는 삶'을 그려본다.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고, 지금 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황인찬
김지연(뉴미디어팀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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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코 올해의 저자는 황인찬 시인이다. 황인찬 시인을 처음 안 것은 『구관조 씻기기』 라는 시집을 통해서였지만, '아 난 이 사람이 정말 좋다.' 라고 느낀 것은 『희지의 세계』, 「종로사가」를 읽으면서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종로사가」를 보며 울고, 먹먹한 감정으로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그 시만 '끝도 없이' 읽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필사도 하고. 내가 나중에 결혼할 남자가 생긴다면 반드시 「종로사가」를 읽은 남자일 것이다(그러면 참 좋겠다). 참, <채널예스>의 인터뷰를 보니 시인님은 굉장한 훈남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 저자일지도.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의 ‘올해의 저자’는 누구였나요?

 

2015년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의 저자를 알려주세요. (책 제목, 저자 이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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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2016년 1월 10일 / 채널예스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