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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다정한 얼굴을 완성하는 법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몇 해 전 추석을 앞두고 외숙모에게 전화가 왔다. 나이 들어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음식 장만이 힘들다며 추석은 쉬고 설날에만 오면 어떻겠냐고 주저주저 운을 뗐다. 그간 매년 명절에 아버지를 모시고 외가에 갔었고 숙모는 20인분 가량 친지의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우리 가족을 각별히 챙겼다. 명절상에 특별요리를 더한 상차림이 예순을 넘긴 숙모에겐 고단한 노동이었을 텐데 미리 헤아려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했다.

 

아버지에게 외숙모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숟가락 몇 개 놓는 건데”라며 표정이 어두워진다. 물론 한 끼 밥을 못 먹어 그러시는 게 아닐 것이다. 친지와의 왕래가 줄어드는 명절에 대한 서운함과 사위어가는 인연에 대한 쓸쓸함을 느끼시는 것 같다. 그래도 가족의 화합을 위해 여자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건 문제다. 나는 대식구 밥 차리는 게 간단하지 않다고, 장을 보고 저장하고 재료를 다듬고 썰고 데치고 조리해 차려내는 일이 중노동이라고, 나도 싱크대에 서는 게 힘든데 숙모는 오죽하시겠냐고, 쉬게 해드려야 한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떤 계기에 인식의 다른 지평이 열리기도 한다는 걸 믿기에 최대한 말씀을 드렸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평생 밥 당번’으로 사느라 뼈가 녹는 고충을 당사자들은 제대로 말하지 않았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고통을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는다. 살면서 제대로 배운 적 없지만 살면서 너무도 필요한 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라는 걸 절감하는 나날에, 참고서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어린 나는 엄마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할 수 없었고, 엄마의 내부에서도 무너지고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마음 쓸 수 없었다. (…)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건실한 남편과 크게 속 썩이지 않는 아들딸을 두고도 그럴 수 있다. 그런 걸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려고, 배웠다. 배운 사람은 그런 걸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13쪽)

 

시인 김현이 쓴 『걱정 말고 다녀와』라는 산문집이다. “엄마가 술에 취해 내게 전화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술에 취한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는 낯선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엄마가 되어본 것처럼, 저자는 다른 존재가 가까스로 되어본다. 애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날 보았던 한 남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카페를 환하게 밝히는 어린 연인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오래된 수습사원이 되어본다. 그리고 퀴어퍼레이드에 와서 북치고 고함치며 남의 축제를 방해하는 혐오세력의 입장이 되어본다.

 

“아마도 스스로를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며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도 지친 몸으로 애인을 향해 갔을 것이다. 그는 애인과 뽀뽀했을까.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얼굴로 애인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날 자신이 보낸 ‘혐오의 하루’를 말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뽀뽀하기 위한 하루의 얼굴’을 어디 감히 그런 얼굴 따위가 이길 수 있으랴. 나는 뽀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42쪽)

 

자신을 뽀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혐오세력의 뽀뽀 불가능성을 예측하는 장면은 통쾌하고, 글을 마무리하며 켄 로치 영화 〈다정한 입맞춤〉을 인용하는 대목은 진실의 무게로 묵직하다. 이렇게 김현은 쓴다. 가만히 응시하고 넌지시 되어보는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켄 로치 영화를 막판에 무심하게 곁들이는데, 그것이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절묘하게 본문과 들어맞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부제가 ‘켄 로치에게’다.

 

“그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요청한다. ‘그들의 애인이,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친구가, 그들의 동료가 되어 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들이 되어보세요.’ 이때의 되어보기는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가상체험이면서 동시에 나는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현실 체험이다.”(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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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레쉬


다정함을 아는 얼굴로 스스로를 완성해


『걱정 말고 다녀와』를 완독한 그날 오후, 나는 재킷 소매 기장을 줄이러 수선집에 갔다. 복도를 막아 만든 그 좁은 공간에 60대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데 밥을 안 해줄 수도 없고, 나이 먹으니까 밥하기가 너무너무 싫잖아.” 
“맞아, 어디 가도 밥 때만 되면 맘이 안 편해. 근데 요즘 애들이 결혼을 어디 일찍 하냐고.”
“왜들 결혼은 안 해? 큰일이야 큰일.”

 

듣자하니 주제는 비혼의 과년한 자식과 같이 사는 일의 괴로움에 관한 것이었다. 달달한 믹스 커피가 든 종이컵을 촛불처럼 두 손으로 감싸 쥔 그녀들의 표정은 밥과 돌봄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는 듯 절절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 내 귀는 점점 쫑긋해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외숙모 같고 저자의 엄마 같고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필 책을 읽고 났는데 이런 장면을 목도했네 싶었지만, 엄마들의 저런 한탄과 하소연은 주변에 늘 흘러다녔다. ‘남의 입장이 되어봄’에 관한 책을 마침 읽었기에 내게 생생히 들린 것뿐일 거다.

 

켄 로치의 ‘되어 보기의 망토’가 공용화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밥 먹는 사람이 밥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이때의 밥하기는 여유 있게 놀다가 모처럼 하는 일회성 노동이 아니라 수십 년간 삼시세끼 노동량이 누적된 상태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반복성 노동이며, “견딜 수 없는 기분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감정이 때때로 찾아왔”(13쪽)을 때에도 몸을 일으켜 차려야 하는 모진 노역이다. 숟가락 하나 더 놓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고 입맛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런 찬찬하고 총체적인 되어보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켄 로치의 재현은 많은 경우 본 것을 다시 보라고 요청한다”(36쪽)고 김현은 전한다. 엄마에게서 엄마를 지우고 한 인간으로 다시 보고, “가장 빨리 미화되고 가장 느리게 진상이 밝혀지는 가족에의 환상”(103쪽)을 차분하게 마주하라는 충고다. 무구한 밥에 얽힌 그 잔인을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정함을 아는 얼굴로 스스로를 완성해”(42쪽)갈 수 있으리라. 

 

다가오는 명절을 맞아 아마 넋두리 2탄을 풀어놓고 있을 수선집 아주머니들에게 나는 김현의 다정을 흉내 내어 말해주고 싶다. “걱정 말고 다녀와.” 그리고 후렴구처럼 켄 로치의 명언도 붙여야겠지. “우리는 무엇이든지 가능하고,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외쳐야 합니다.”(50쪽)


* 채널예스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