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엽 사진가 - 레닌에서 만화까지, 사진 그 가능성의 중심

[행복한인터뷰]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 진은영 ‘긴 손가락의 詩’ 중에서

   

# 레닌, 기억  

레닌이라니. 전생에 잠깐 스친 첫사랑처럼 흠칫 발걸음을 불러 세우는 이름이다. 우연찮게 일 년 터울로 세 권의 책이 나왔다. <레닌의 노래>(2006) <레닌이 있는 풍경>(2007) <지젝이 만난 레닌>(2008) 각각 시집, 사진책, 철학서인데 표지나 표제가 빨갛다. 마치 3부작 같다. 아직도 참숯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레닌을 호명하는 이들은 뉘신가. 시인 김정환은 레닌을 노래했다. 기억의 시간의식이 ‘지워지는 것’은 지나간 삶의 의미와 가치가 ‘짓밟히는’ 것이라며 “인간의 조직이 아름다웠던 시간”을 환기했다. 철학자 지젝은 레닌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레닌이 반복되어야 한다며 “아연할 정도로 실패한 이름 레닌” 안에는 구현해낼 가치로 충만한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음을 주장한다.

사진가 이상엽은 몰락의 땅, 레닌의 나라로 떠났다. 시베리아횡단열차 타고 9,938km를 달렸다. 도시 곳곳마다 거리의 풍경과 살을 섞으며 다리 아프게 서 있는 ‘지독히 쓸쓸한’ 레닌을 목도했다. 세상은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레닌을 보이지 않게 했지만 그는 “한 시대 종말의 지표이자 미래사회에 대한 묵시론적 풍경” 레닌을 되살렸다. 기록함으로써 기억했다.  

레닌이 있는 풍경


늦여름 충무로. 오후6시 잔광이 흩날리는 길모퉁이에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멈춘다. 좁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어깨에 레닌의 쓸쓸함이 내려앉은 듯하다. 참 오래도, 그리고 멀리도 돌아왔다. 최루탄 매캐한 아스팔트로 출근하던 새내기 사진기자가 중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사이 그는 20개국이 넘는 아시아 땅을 밟았으며 중국 10년, 러시아 3년, 긴 호흡으로 작업했다. 우리 땅에서는 이상한 숲 DMZ, 용산 철거민, 4대강 등을 기록했다. 미순이·효순이 사건 때 사진가 100인 시국선언을 주도했고, 얼마 전 4대강 살리기 사진가 80명의 서명도 이끌어냈다.  

더보기


 

신고

<개념정리> 욕망하는 신체의 정치경제학

[정신분석혁명]

# 복합적 신체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해 ‘우리가 기계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데 기계가 맞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노동자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로 산업기계의 이지적 기관이다. 인간이 어쩌다가 산업기계의 부속이 됐을까. 자본의 욕망(리비도)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몸집을 불리기 위해 인간을 손으로, 화폐를 혈액으로 삼아 생산물을 낳는 신체다.

자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욕망하는 신체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이고 기계처럼 작동한다. 욕망의 흐름 속에는 인간과 기계, 사물과 동물의 구별없이 모두 접속하여 네트워크 형태의 신체를 구성한다. 즉, 하나의 부분-기관이 항상 다른 부분-기관에 연결되면서 형성되는 리비도적 신체이다. 어떤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고 어떤 흐름을 절단-채취하는지에 따라 신체는 매번 다른 복합체의 기계적 기관이 된다.  

더보기

 

신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우리시대 이데올로기의 실재들

[비포선셋책방]

라캉의 실재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에 관한 정의는 흡사 선문답을 연상시킨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선문답은 쉽고 간결하고 명확하나 깨닫지 못한 입장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실재는 관성적인 현존, 실정성의 충만, 상징적 질서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 간극이다. 실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하고 꿰뚫을 수 없는 중핵.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론적인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괴한 순수 실체이다. 등등. 실재는 단단한 덩어리이면서 구멍이고 현존하면서 선행한다. 라캉(지젝)에게 이데올로기는 환상이고 이 세계를 이루는 상징질서이다.  실재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박정수의 분석을 참조해 우리시대 이데올로기의 실재들을 살펴보자.

* 파시즘의 실재

파시즘의 인간관계는 고문자와 피고문자처럼 물리적 힘(폭력)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여기에는 계약이라든가 교환같은 시장의 공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힘만이 주인과 노예를 결정짓는 변수이다. 파시즘은 주로 남자다운 군인정신으로 표출된다. 교사와 학생, 가부장적 아버지와 자식, 때로는 연인관계에서도 ‘힘’으로 관계를 제압하려는 시도들은 종종 발견된다. 파시즘을 행사하는 이들은 왜소한 자아를 갖고 있다. 타자의 존재와 노예의 인정에 의존해서만 쾌락을 생산한다. 즉, 타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가련한 노예다. 자기 스스로는 어떤 자존감도 느끼지 못하는 이 작은 인간들은 ‘가족’이나 ‘군대’ ‘민족’ ‘국가’라는 더 큰 ‘나’의 집단 동일성 속에서만 자긍심을 찾는다.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이들, 혼자서는 못 노는 '다 큰 어린애들'의 과장된 위안처다. 파시즘은 자본의 시장논리가 아니라 국가라는 폭력장치를 이용하여 시장을 장악한다.
 

더보기



신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