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진 한장

[사람,기억,기록]

제주에 강연 갔다가 손석희 씨를 만났고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좋아요가 일천개, 댓글이 일백개가 되어가고 있다. 뭇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그는 거의 국민적 영웅인 거 같다. 실물 대면 전에 막연히 생각한 것보다 더 괜찮은 기운이 나오는 그에게 호감을 느낀 나는 새로운 책을 홍보할 겸 사심을 갖고 같이 사진을 찍었으나, 마음 한켠 꺼림칙함이 가시지 않아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 신체의 계급성 

손석희씨랑 사진 찍기까지 많이 주저했습니다. 일단 영웅적으로 추앙 받는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감이 있어서고요. 사람은 누구나 허물과 결핍을 가진 '깨진 꽃병'인데 신비화가 가능하고 필요한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같아요. 한 사람이 수십년 한국 언론인의 상징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면 그건 당사자의 탁월함도 있겠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형무형의 힘도 클 것입니다. 그는 이성애자 중산층 비장애인 기혼 남성으로서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차별이나 배제의 위험으로부터 손상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받고 살았음을 그의 너무도 완벽한 신체-이미지가 증명합니다. 

'맥락 저널리즘'을 만들어내는 뉴스룸의 브리핑을 위해서 서너명의 작가가 투여된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전에 14년 간 진행한 라디오 '시선집중'도 그렇고, 방송이라는 협업의 결과물이 궁극에는 전부 보여지는 한사람으로 수렴되는 구조가 저는 이상합니다. 방송작가들은 소모품처럼 계속 교체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 방송에 오래 몸담은 그는 문제의식을 얼마나 갖고 있을까 싶으면 마냥 좋아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손석희라는 사람에 대해 마음이 복잡했어요. 근데 막상 실제로 보니까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이 부드럽고 사려깊었어요. 자기 좋다는 사람에게 다정하지 않을 사람 없겠지만요. 또 워낙 상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존경할만한 공인이 없어서 그가 더 돋보이는 것일테지만 잘 나이 든 근사한 어른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렜습니다. 자기 업에 자부심 있고 개혁가의 면모도 돋보였고요. 수십년 한길을 간 언론인 손석희는 존경받을 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수십년 오직 한 길을 간 구두 장인은 손가락이 굽고 허리도 휘어 동안이 절대 될 수 없으며 월급 200만원도 안 되는 사회라는 것을 잊지 않고, 그와 찍은 사진, 추억을 기념하려 합니다. (웃으며 찍은 사진에 정색하고 각주 달아서 죄송합니다. -.-;;)


출판하는 마음... 알면서 '외않사'

[사람,기억,기록]


신청은 여기로 https://goo.gl/forms/yC5dWQ4vXyJwn8xy1

우리가 한바탕 이별했을 때

[은유칼럼]

마흔이 되자 친구들이 이혼하기 시작했다. 배우자가 무책임해서, 시댁이 무례해서, 같이 있기 싫어서 갈라선다고 했다. 남 일은 아니었다. 나도 한달간 떨어져 지냈다. 사람이 이토록 미워지는 마음이 참 낯설었는데, 내가 지은 밥을 그가 먹는 게 싫어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결심했다. 소설가 위화는 책을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는단다. 계속 읽으면서 작가를 미워하긴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장 덮듯 나도 얼굴을 덮고 싶었다.

‘한부모 여성 가장’이 된 친구들은 아이에게 이혼 알리기를 가장 어려워했다. 아이가 어릴수록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회사 일로 떨어져 지낸다, 아빠는 외국에 갔다는 철 지난 유행가 같은 이유를 둘러댔다. 결혼 10년간 한 번도 생활비를 준 적 없는 남편과 헤어진 선배는, 짐을 벗어버렸는데 생각만큼 후련하지 않고 살아갈 힘도 같이 사라졌다는 야릇한 말을 남겼다. 인간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나는 타협했다. 여자로서 독립적이나 엄마로서 자립적이지 못했다. 대체 양육자가 없으니 어차피 오래 끌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 참고 산다는 말. 비주체적이고 비겁해 보였지만 그 참음이 다른 고통보다 나으니까 참아졌다. 사랑으로 한시절 살았기에 사랑 없이 한시절 살아갈 수 있었다. 친구 따라 이리 뒤척, 내 맘에 지쳐 저리 뒤척 하는 동안 나라는 존재의 나약함에, 여성이란 종의 고통에 조금씩 눈떴다.

그때, 우리가 한바탕 이별했을 때 ‘고민거리’로 여겨졌던 아이들의 존재가 들어온 건 근래다. 이십대가 된 내 아이 또래가 글쓰기 수업에 오면서 ‘헤어진 부모’에 관한 글이 부쩍 늘었다. 부부 싸움이 시작되는 전조를 감지하는 초조, 쟤만 없으면 당신이랑 안 산다는 말에 덴 자국, 아빤 외국에 갔다는 엄마의 세뇌, 아빠의 재혼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며 울던 기억,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너도 아빠 없니? 나도 따로 살아, 라고 말해 비밀 친구가 된 일화, 조손 가정이란 구멍을 메우기 위해 죽기로 공부에 매달렸다는 고백.

약자에 가려진 약자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혼은 어느 날 부모 한 명이 증발하는 일이고, 남은 부모의 안색을 살피는 고도의 정신노동이 부과되는 삶이며, ‘너라도 잘 커야’ 하는 장기 채무가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옆에서 생생한 아픔을 겪는 한 존재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애들은 몰라도 되는 어른 문제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6살 여자아이 ‘무니’의 무지갯빛 표정이 화면을 꽉 채운다. 싸구려 모텔에서 단기투숙자로 미혼모 엄마와 사는 아이는 가난과 결핍의 공간을 생성과 자극의 놀이터로 만든다. 이 낙담하지 않는 악동은 자신의 신묘한 능력을 고백한다. “난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엄마의 기후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는 것도 아이고, 어떤 절망에 빠졌어도 라면 수프 같은 복원력으로 생기를 되찾는 것도 아이다.

“고통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고통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순 없다”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는 뜻이다. 한부모 가정 아이는 불행하다기보다 예민하다. 그 예민함의 촉수로 무니가 타인의 슬픔을 포착하듯 또 다른 무니들이 삶의 무수한 장면을 읽어내고 속 깊은 글을 써내는 걸 나는 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혼은, 한부모 가정은, 누구의 무엇을 언제를 기준으로 결핍이고 약점일까. 나와 내 친구가 오매불망 걱정했던 그 작았던 아이들은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옆에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9511.html?_fr=mt5#csidx70d0137672b79808b04799e10a3f06e 

<출판하는 마음> 드디어 나왔습니다

[사람,기억,기록]

<출판하는 마음> 드디어 나왔습니다. 표지 예쁘죠? 저 뒷모습 (<쓰기의 말들> 읽는) 박보검 설 ㅋㅋ🤔 숨겨진 노동에 관한 이야기면서 현업 종사자들의 책 내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 직업에 관한 소개서입니다. 미래의 출판꿈나무들에게도 권해주시고 많이 읽어주세욤. 

"나는 글과 책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이 내 안에서 도는 피라면,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리베카 솔닛)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모호한 자의식은 제쳐두고, 비용을 지불하고 책을 사는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지, 독자가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데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지를 독자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글과 책, 저자와 독자, 의미와 상품, 도덕과 시장의 길항으로 움직이는 출판 시장의 원리를 내 방식대로 조금씩 파악했다. 

(...)

어떤 일이든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런데도 혼자만 열심인 건, 말하자면 그 일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 이시카와 다쿠보쿠 『슬픈 인간』 

책은 부단한 협동의 결과물이다. 저자의 힘으로만 나오는 게 아니며 출판사라는 보통명사 뒤에는 편집자, 북디자이너, 마케터, 제작부, 엠디, 서점인 등의 숨은 노동이 있다. 앞서 말한대로 분업 시스템 하에서 책은 무서운 속도로 생산되고 독자의 눈앞에 전시되다 사라진다. 출판계 종사자들은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고 아침마다 수치로 제시되는 판매량 성과에 좇긴다. 출판노동자의 르포집 『출판, 노동, 목소리』 에 나오는 편집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좋은 책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회사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 됐고, 회사는 내게 단지 책을 빨리 만들 것을 주문했다.” 책을 ‘만들지’ 못하고 ‘쳐내기’ 바쁜 상황이다보니 동료 간 서로의 업무를 숙지하고 상대 속사정을 헤아릴 소통의 기회는 더욱 드물다."

- 서문 중에서



딸 없으면 공감 못하나

[은유칼럼]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동성 친구에게 힘든 얘기를 잘 안 한다고 남자 지인이 말했다. 그 자리의 네댓 명이 대체로 동의했다. 내 아버지나 남편, 동료들을 봐도 결정적인 고민은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친구랑 전화통 붙들고 운다. 친구의 긴급 호출도 물론 온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왜 그런지 토론했다. 한 중년 남성은 사회생활의 경쟁 시스템에선 하소연이 곧 약점이 되어 불리하니까 숨긴다고 했다. 

여자들의 고민 공유, 즉 수다는 약자들의 연대라고 나는 말했다. 말해봐야 잃을 것도 없고, 말이라도 해야 후련하니까. 일종의 궁여지책이다. 품앗이처럼 말하고 들어준다. 그러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타인의 처지도 공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난 어려서부터 엄마가 친지랑 전화 통화하는 걸 엿들으며 여자의 일생을 배웠다. 이런 소소한 일상의 누적이 여성의 공감 능력을 신장시켰을 거다. 반대로 ‘센 척’하느라 말하고 듣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남성은 공감 능력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을 테고. ‘수다’를 떨지 않는 아버지들은 풀어내지 못한 자기 고충을 ‘주사’로 토한 것도 같다. 

모든 존재의 행위는 저 살려고 하는 일. 여성학자 벨 훅스가 말한 ‘감정적 자기 절단’이 남자들 생존에 유리한 시대가 있었다. 그 긴 세월 부작용이 일상의 폭력을 낳았음을 미투운동이 증명한다. 미투운동이 일자 술렁이는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잠잠했다. 참회하느라 그런다, 켕겨서 그런다, 조심하느라 그런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내가 볼 땐 몸치처럼 주춤했던 거 같다. 타인의 고통에 깊게 개입하고 슬픔의 장단을 맞춰본 적이 없기에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그 와중에 딸 키우는 아빠로서 미투운동을 지지한다는 글을 봤다. 어딘가 궁색하고 근원이 수상쩍다. ‘아무 남자에게 내 딸 못 준다’는 말이나, 티브이 자막에 박히는 ‘딸바보’ 인증이 거북살스러운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 정서와 내 핏줄의 안위가 중한 가족주의에 기반한 발언이다. 그냥 단독자로서 어른 남자이기만 해서는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건 많이 어색하고 어려운 일일까.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헬멧에 세월호 리본을 부착한 김아랑 선수가 화제였다. 환한 미소만큼 인품이 돋보였다. 속사정을 알진 못하지만 김아랑 선수의 공감이 적어도 부모나 누이로서, 즉 혈연을 매개로 한 반응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슬퍼하고 슬픔의 인파가 빠져나간 자리에서도 묵묵히 애도했기에 울림이 더 컸다.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이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이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 남 일에 무관심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올릴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 관계의 무능함으로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엽서에서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5429.html?_fr=mt5#csidx3a639e46adcb520a719e3ecd68f7430 

은유 읽다 - 시시콜콜 시詩알콜

[은유칼럼]


5년 만에 해외여행을 간 건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여행 계획을 밝히며 가고 싶으면 붙으라고 했다. 소싯적 ‘줄넘기할 사람 여기 붙어라’에 엄지손가락 잡듯이 나는 붙었고 다른 친구도 붙었다. 여권 번호와 영문 이름을 불러주고 친구가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했다. 그때가 초여름, 여행은 가을. 실감나지 않았다. 집필·강연·살림이 회전문 돌아가듯 들이닥치는 일상에서 나는 과연 일주일간 훌훌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눈을 떠보니 타이 북부 도시 치앙마이. 한국에서 기껏 폭염을 견디고 다시 무더위 복판에 던져졌다. 사놓고 한 번도 못 입은 끈 달린 원피스에 슬리퍼 끌고 손바닥만 한 핸드백 메고 여행자 모드로 변신했다. 휴대전화 로밍은 하지 않았다. 할 일 없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과 읽지도 않을 책을 넣은 무거운 가방에서 해방된 일상은, 가능했고 충분했다. 

이러한 내 쾌락의 이면에 타인의 노동이 있다는 걸 셋째 날이 지났을 때 알았다. 여행을 주동한 ‘친구 1’은 항공사 우수회원에 영어 능통자다. 남의 나라 골목 구석에 있는 음식점도 구글맵으로 척척 찾아낸다. 예약부터 안내, 예산 집행을 가이드처럼 도맡았다. ‘친구 2’는 영상 작업을 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 추억을 기록했고, 특유의 준비성을 발휘해 맛집, 명소 등 여행 정보를 챙겨왔다. 나는 휴대전화 안 됨, 영어 못함, 체력 약함을 핑계로 그냥, 마냥 따라다녔다. 조금 미안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는데 친구 1이 한번은 말해버린 것이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가는 길이라도 찾아 좀.” 

앗, 그건 내가 밥 짓느라 동동거리면서 애들한테 “수저라도 좀 놓아”라고 하는 말의 톤과 뉘앙스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친구 1, 친구 2는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다. 나이도 내가 제일 많다. 교실 밖 여행 속에서 나는 ‘쌤’이 아니라 무지렁이가 되었고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여겼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그들 처지에선 여행이 서툴고 ‘원래부터 못한다’라며 두 손 놓은 나를 부리거나 내게 성질내긴 어려웠을 거 같다. 

“우리 팀은 분위기가 좋아. 이상한 사람도 없고.” 팀장이 말하면 팀원들이 겉으론 같이 웃지만 속으로 ‘이상한 사람=너님’이라고 말하는 웹툰을 본 적이 있다. 위계와 위치에 따른 감각은 이토록 다르다. 내가 안락하면 남은 그만큼 힘겨운데 안락한 자는 그 사실을 몰라서 더 안락하다.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좁은 곳, 무엇도 영원히 숨길 수 없(184쪽)”다. 그런데도 “티를 덜 내고 감정을 참고 내 자신을 속이는 게 언제부터 어른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181쪽)”. 어른스럽지 않게 티를 내준 친구 1이 고마웠다. 덕분에 어른스럽지 않은 행동을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 

가을 여행 이후, 우린 한겨울에 재회했다. 친구 2가 깜짝 선물을 내밀었다. 나와 친구 1의 사진을 손수 편집한 앨범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여기는 반캉왓, 와로롯 마켓, 호시아나 빌리지…. “사라져버릴 소중한 ‘그때’를 묵념하는 것 같은 순간들(107쪽)”에 울컥했다. 쓸쓸할 때마다 두고두고 어루만질 실물 추억이 생긴 것이다. 타인의 친절로 떠나고 즐기고 기록된 여행. 사진 속 내가 부자처럼 웃는다. 마음에 쌓아둔 친절을 난 누구와 나눌까.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둬// 쓸쓸할 때면/ 그걸 꺼내/ 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 모아두렴/ 연금보다/ 좋단다’ (저금-시바타 도요, 122쪽).


* 시사인 은유 읽다


서울, 패터슨의 가능성

[은유칼럼]

평일 오후에 이런 적은 처음인데 싶어 연신 창밖으로 몸이 기울었다. 정류장이 코앞. 신호가 몇번 바뀌도록 버스가 꼼짝 못 하자 기사는 뒷문을 열어주었고 승객 서넛이 내렸다. 큰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정류장도 아닌 데 차를 세웠다며 뒷문 쪽에 웬 남자가 서서 목청을 높였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 줄 아느냐, 운전기사가 아무것도 모른다, 형편없는 사람이다, 라며 그는 술 취한 아버지처럼 한 말 또 하기 신공을 발휘하더니만 느닷없이 화제를 자신에게 돌렸다.

“내가 말이야 모자 쓰고 잠바때기나 입고 있는 늙은이라고 날 무시해!” 짙은 밤색 모자와 남색 외투를 입은 행색은 단정하고 허리는 꼿꼿했다. 행동도 민첩했다. 핸드폰을 꺼내 차 문 위에 붙은 교통불편 신고 전화번호를 누르고 차량 번호, 위치, 신고 내용을 읊고는 꼭 처리해달라며 끊었다. 그사이 버스는 정류장에 닿았고 중얼중얼 단죄를 멈추지 않으며 그는 퇴장했다.

가래 끓는 말들의 악취가 버스에 낭자했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기사님은 묵묵히 차를 몰았다. 빈 의자 없이 좌석을 채운 승객들은 정물처럼 조용했다. 만약 기사가 멱살을 잡혔다면 누군가 말렸을까. 이 공공연한 멸시와 억측의 현장에서 나는 무기력했다. 이 정도는 부정 정차가 아니다, 기사님한테 왜 막말하느냐, 당신이야말로 업무방해죄로 신고하겠다는 말은 입 밖으로 터져나오지 못했다.

일전엔 밤 10시 무렵 버스 뒷자리에서 젊은 여성 둘이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어 칸 앞에 앉은 중년남성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조용히 하라’고 했다. 취기 섞인 음성과 불그레한 얼굴은 위압적이었고 여성들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근데도 압박의 제스처가 계속된 모양이다. “왜 자꾸 기분 나쁘게 쳐다보세요? 아저씨가 뭐라고 한 뒤로 우린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여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고 남자의 대응은 없었다.

때로 버스는 폭력을 잉태한 가부장의 공간이 된다. 사회적 약자들, 특히 자리를 뜰 수 없고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는 운전기사는 쉽게 사물화된다. 한평도 안 되는 일터에서 겪는 기막힌 일들, 무례의 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저 울화를 누구에게 얘기하고 이해받고 몸 밖으로 흘려보낼까. 행여나 그 얼토당토않은 신고 때문에 징계를 받는 건 아닌지, 걱정은 하면서도 난 버스회사에 전화 한 통 넣지 못했다.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사무치는 나날이다. 일터 괴롭힘이든 아동 학대든 학교 왕따든 성폭력이든 다수의 침묵과 방조 없인 불가능하단 얘기다. 살면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피해자가 됐을 때 대응하자며 공부하지만 시급한 건 목격자로서 행동 매뉴얼,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 같다.

영화 <패터슨>의 남자 주인공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그는 운전석이라는 공적 공간에 비눗방울 같은 막을 만들어 고요를 누린다. 사람과 주변을 관찰하고 시상을 떠올리며 짬짬이 시를 쓴다. 그의 내적 세계를 함부로 터뜨리거나 침해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가진 노동하는 존재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장면은 천국 같았다. 우리 일상이 시를 낳는 공간이 되려면 똥물 같은 언사를 휘두르는 현실에 눈 돌리지 않고 같이 뒹굴고 치워야 할 것이다. 새해엔 나도 ‘반격하는 몸’이 되고 싶다. 시 쓰는 운전기사를 위해.


*한겨레 삶의 창 

김장 버티기

[은유칼럼]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는데, 찬 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남도의 땅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김치를 중시했다. 배추김치는 기본에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를 번갈아 담갔고 김장철엔 손이 더 커졌다. 김치 가져가라는 전화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선 냉장고에 자리도 없는데 또 담갔냐고 기어코 한소리하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 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김치는 빨리 동나고 산 김치는 비싸서 감질나고,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생에 김치노동까지 추가되면 끝장이라는 비장함으로 안 배우고 버텨왔다. 할 줄 알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일 게 뻔하니까, 식구들이 잘 먹으면 먹이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말리는 심정으로 김치 먹을 자유보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수호하고 있다. 

“이번엔 황석어젓을 사봤는데” “고춧가루 빛깔이 안 좋아서 속상해” “올해는 절임배추 써볼까 하는데” 요즘 시장에서, 거리에서, 버스에서, 목욕탕에서 나이 든 여자들은 둘만 모였다 하면 김장 얘기다. 마음에 김치가 사는 나는 이런 목소리를 줍고 다닌다. 머리가 허옇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도 장바구니 달린 보행기를 밀고 다니면서 쪽파며 배추를 실어 나르는 동네 할머니를 본다. 

살아계셨으면 일흔일곱. 우리 엄마도 저이들처럼 억척스럽게 장 보고 김장을 하고 삭신이 쑤신다며 앓아누우셨을까. 엄마는 그즈음 부쩍 음식 간이 안 맞는다고, 뭘 해도 맛이 없고 김치도 짜기만 하다고 낙심했다. 혀가 늙는다는 것도, 김치 담그기가 중노동이라는 것도 삼십대인 나는 알지 못했다. 김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을 그 시절 엄마가 알지 못했듯이. 

어쨌거나 나는 매년 김장 김치를 먹는다. 파는 김치는 비위생적이며 당신 손으로 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여기는 시어머니가 담가주시고, 가까운 이들에게 사랑의 김장이 답지한다. 올해는 친구의 시골 노모가 담근 김치를 분양받았다. 양이 많다며 배추김치 한 통에 덤으로 총각김치랑 묵은지까지 보내주었다. 끼니마다 콕 쏘는 김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면서도 목 안이 따끔하다. 한 여성이 소위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듯이, 내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의 산물인 김치를 먹게 된다. 얼마나 손끝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고 생강을 다지고 배추를 씻고 절이고 버무렸을까.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unpaid work)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한 동료의 엄마는 여든살을 맞아 김장을 안 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늦은 은퇴다. 엄마들의 잇단 김장 파업 선언에 김치 난민이 속출하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을 그려본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2724.html?_fr=mt5#csidx59f1e4f302efc4dba1b0897023be44f 

닉네임이 더치페이를 만났을 때

[은유칼럼]

나이 들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십 년 전이다. 모름지기 저것이 올바른 노년의 처세라며 탄복했었다. 심상하게 나 자신을 얻어먹는 위치에 두었거나 태평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중년 이후를 자신했던 거 같다. 실상은, 위계 구조에 속한 직장인이 아닌 프리랜서로 근근이 살다보니 나 혼자 입도 열고 지갑도 열며 나이 들고 있다.


간헐적으로 글쓰기 수업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한다. 10대부터 60대까지 나이, 직업, 성별, 주머니 사정이 제각각인 소규모 만민공동회 같은 구성체인데, 유급 노동자로서 상호 이해가 얽혀 있지 않아서 동등한 관계 맺음이 가능한 편이다. 그래도 사람 모인 곳이라면 어디서나 권력을 작동하게 하는 두 가지를 피해갈 수 없으니 바로 호칭과 돈이다.


호칭은 닉네임을 ‘님’자 빼고 부르자고 권한다. 한번은 어느 학인이 “은유 글에서도 착한 딸 역할을 강요하는 부분이 보여요”라고 비판했다. 정말 그런가? 난 내 글을 남 글인 양 은유 글로 재차 검토했다. “선생님 글에서도(…)”라고 하는 것보단 확실히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걸 느낀다. 닉네임은 존칭에 따른 감정 소모를 줄이고 말의 내용과 맥락에 집중하게 하며, 통상 연장자 순으로 배정되는 말의 점유를 막아주었다.


돈 문제는 더치페이로 탈권위주의를 도모한다. 애초엔 소득과 고용 형태에 비례해 차등 적용했다. 과제 미제출이나 지각 시 벌금을 정규직 1만원, 비정규직 5천원, 무직 3천원으로. 근데 이게 또 서열이 돼버렸고 본의 아니게 정규직에게 가부장의 짐을 지웠다. 어차피 과제 안 하고 지각하면 그 자체가 형벌이기에 이중처벌 금지에 따라 벌금을 없앴다. 뒤풀이를 하면 인원수대로 나누어 낸다. 억대 연봉자도 시급 알바생도 강사도 공평하게. 원칙은 이렇게 정하고 지역에서 올라와 교통비가 많이 드는 이나 보릿고개를 넘는 이 등 속사정을 아는 한도에서 눈치껏 배려했다.


나는 닉네임 쓰기보다 더치페이 하기가 더 어려웠다. 세월이 나를 연장자 축에 데려다놓았고 지갑은 채워주지 않았지만, 왠지 팍팍 열어야 할 것 같아 손이 움찔거렸다. 그러는 나를 ‘고리타분하게 왜 이러느냐’며 젊은 친구들과 유학파 출신들이 말렸다. 나의 지갑 열기 충동을 되돌아보았다. 돈을 통한 지배 의지인가, 배제에 대한 불안인가, 내리사랑의 선의인가. 가(식)없는 증여를 위해선 해처럼 넘치는 자가 되어 베풀어도 가진 것의 총량이 줄지 않아야 하는데 그 조건에 난 미달했다.


아무튼 자기 처지가 어려워 남의 형편도 헤아리는 ‘요즘 젊은이들’ 덕분에 ‘쿨하고 힙하게’ 관계 맺는 법, 지갑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를 분간하는 법을 배운다. 권위주의 타파하고 상호 평등 이룩하자, 구호뿐이던 일상에 닉네임과 더치페이 실천으로 틈이 생기고 섬세한 시야가 열렸다. 계급장 뗀 그 사람의 안색, 형편, 고민을 보게 됐다. 아울러 나이, 지위, 재력 등 외적 조건을 우선시하는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타인에 대한 고통 감수성이 부족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얼마 전, 세 시간 거리에서 통학했던 한 학인에게 문자가 왔다. “우리 회식할 때 저한테 멀리서 왔다고 회비 아껴두라고 말해줬었는데 그게 고마운 밤이네요. 오늘 우리 글 모임 회식하는데 서울에서 온 친구에게 회비 내지 말라고 말하려고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라는 걸 상기한 덩달아 고마운 밤이었다. 호칭의 간소화와 지출의 민주화가 노년 초년 할 것 없이 생활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괜한 체면의 무게로 뒤뚱거리는 삶이 좀 더 가벼워질 것 같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4441.html?_fr=mt5#csidx336aa9fad962f2897ae8b0b08996567 



리베카 솔닛 인터뷰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글자를 배우기 전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리베카 솔닛이 처음 되고 싶었던 건 도서관 사서였다. 도서관은 일어났던 모든 일이 저장되어 기억되는 장소였고, 그 안에는 세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책이라는 보물 상자를 열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었고,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책과 한층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됐다. 

ⓒ시사IN 윤무영

솔닛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깊고 넓어서다. 때로 시 같기도 하고 때로 잠언 같기도 한 문장은 독자를 오래 책 속에 붙든다. 자전적인 이야기와 성찰에서 출발하는 글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비평을 잇고, 환경과 인간의 역사를 엮으며, 종내 사회와 정치에 대한 논평으로 밀고 나간다. 

여러 사상가와 작가의 문장을 재료로 삼지만, 솔닛의 글은 단단한 ‘현장’ 위에 서 있다. “내게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가르쳐준 것은 네바다 핵실험장이다(영국 문예지 <화이트리뷰>, 2013년 인터뷰)”라고 할 만큼, 솔닛은 작가와 활동가라는 두 가지 역할을 충실히 살아왔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고, 저널리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부터 인권운동, 기후변화, 아메리카 원주민 토지권 반환운동, 반전운동, 반핵운동의 현안에 참여해왔고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에도 적극 가담했다. 2010년 미국의 대안 잡지 <유튼 리더>는 솔닛을 ‘당신의 세계를 바꿀 25인의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솔닛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는 2008년에 찾아왔다. 미국의 독립언론 매체 <톰 디스패치>에 기고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라는 제목의 원고는 이전에 쓴 어떤 글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널리 퍼졌다. ‘맨스플레인(mansplain:man+explain)’은 2010년 <뉴욕타임스>가 꼽은 ‘올해의 단어’가 됐고,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에도 등재됐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는 국내에서 3만 부가 넘게 팔렸다. 

신간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창비)와 개정 출판된 <어둠 속의 희망>(창비), <걷기의 인문학>(반비) 출간을 기념해 솔닛이 8월25일 4박5일 일정으로 처음 방한했다. 강연회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신청자가 폭주했다. 애초 150명 정도 수용 가능한 강연 장소를 준비했던 출판사는 800석 규모의 행사장을 다시 마련해야 했다. 최종 신청자는 1400명이 넘었다. 유료 행사 ‘페미데이’ 역시 일찌감치 마감됐다. 몇 년 전 방한한 마이클 샌델이나 슬라보예 지젝을 능가하는 대중 동원력이었다. 주요 매체가 강연 현장을 보도했다. ‘솔닛 현상’이라 부를 만했다. 

<시사IN>은 8월26일 서울 마포구 베스트웨스턴프리미어 서울가든호텔에서 리베카 솔닛을 만났다. 대담자로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 <글쓰기의 최전선>(메멘토) 등을 쓴 은유 작가가 나섰다. 독립 연구자이자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여성의 글쓰기와 에세이에 대해 1시간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회견과 강연장에서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시사IN 윤무영 8월26일 은유 작가(왼쪽)와 리베카 솔닛은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며 글쓰기와 에세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은유:이번에 개정 출판된 <걷기의 인문학>에 “솔닛의 글쓰기를 훔치고 싶었다”라는 추천사를 썼다. 환경운동가·철학자·페미니스트·예술가 등 다양하고도 입체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계기가 있었나? 솔닛:이민 2세대(솔닛 어머니의 조부모는 아일랜드, 아버지의 부모는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지대 출신이다)이자 좌파 성향을 가진 가정환경이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트로츠키주의자였고, 외할아버지는 아일랜드의 반식민혁명을 지지하셨다. 또 내 남동생은 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했다(솔닛의 남동생인 데이비드 솔닛은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던 시애틀에서 이른바 ‘시애틀 대첩’이라 불리는 반WTO 시위를 주도했다). 동생이 뉴스레터를 발간할 때 내가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 이슈들이 얼마나 응급한지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다. 

은유:현장 기반의 공부가 글을 쓸 때 어떤 도움이 되었나? 솔닛:일단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를 말하고 싶다. 여성으로 산다는 일은 일상적으로 굉장히 많은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다. 여성도 자유롭고, 안전하게 또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이를 일종의 시민권 문제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게 여성 이슈는 사적인 문제이니 그냥 이런 환경에 적응하라고 조언했다. 이를테면 좀 더 남자처럼 보이게 입어라, 아예 총을 사라, 호신술을 배워라, 생활수준이 높은 동네로 이사를 가라…. 남성 폭력이 만연한 환경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에 적응하라고 나에게 강요했다. 

은유:나는 가부장 사회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에게 부여되는 많은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페미니즘 공부가 절로 됐다(웃음). 당신에게 부여된 다양한 역할이 있는데, 일과 공부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나? 솔닛:조카를 여럿 둔 고모로서 나 역시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다(웃음). 남편이 없고, 아이가 없다는 게 시간을 절약해주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활동가나 작가로서 공적인 삶이 요구하는 것들이 늘어나다 보니 사적으로 연구를 하거나 공부하는 데 시간적으로 방해를 받기도 한다. 다행히 이번 방한 일정을 마치면 히말라야에서 머물 예정이다. 그런 시간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은유:솔닛이 추구하는 인문학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의 인문학과 어떻게 다른가? 솔닛:페미니즘의 근간이 되는 생각은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많은 가정폭력이나 차별 같은 불의한 일이 분리되고 구별함으로써 감춰지는데, 나는 그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내 작업을 해왔다. 역사학자는 이거, 인류학자는 이거, 하는 식으로 각각의 학문 분야를 분리해서 보는 시각은 거부한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생태학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모든 것은 상호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의 위기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보수 이데올로기가 야기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빈곤의 문제는 사회나 경제 시스템과는 무관한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이 말대로라면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줄 필요가 없다. 고립주의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의 대립항으로 상호연결성, 의존성에 기반한 진보 진영의 사상이 인문학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은유:한국에서는 논픽션이나 에세이를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사사롭게 여긴다고 할까. 솔닛:미국에서도 논픽션이 비슷하게 폄하되는 측면이 있다. 시나 희곡, 소설은 고매한 문학인데 저널리즘은 쳐주지 않는 식으로. 그러나 지난 20여 년에 걸쳐 미국에서는 논픽션의 위상이 계속 올라간 측면이 있다. 

은유:솔닛의 영향인가?(웃음) 솔닛:전혀(웃음). 나는 사실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는데 마치 유색인종을 지칭할 때 논화이트(non-white, 백인이 아닌 사람)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픽션을 기준으로 하는 분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전이나 지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논픽션이 세계를 소유하고, 픽션은 그 안에 있는 섬 아닌가? 나는 논픽션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은유:사람들이 나에게 ‘언제 소설 쓰냐?’ ‘시는 안 쓰냐?’라고 묻는다. 솔닛: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그렇게 묻는다. 그게 꼭 글쓰기가 오를 수 있는 정상인가? 되묻고 싶다. 

은유:조지 오웰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라고 했다. 어떤 독자가 당신의 방한 행사를 다녀와서 이런 후기를 남겼더라. ‘나에게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이 온 정도의 존재다.’ 솔닛:글을 쓸 때 ‘오웰이라면 어떻게 썼을까’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너무 감사한 평가다. 

은유:글쓰기 수업을 할 때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반비)을 꼭 넣는다. 에세이의 힘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굉장히 공감하는데, 남성들은 난감해한다. 이 감수성의 차이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나? 솔닛: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성 위주의 교육,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백인 남성 위주의 교육을 받는다.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와 책을 접하게 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콘텐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책을 쓸 때도 남성 독자에게도 꼭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멀고도 가까운>을 쓸 때 남성 독자를 타깃으로 생각하거나 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건 논픽션에 대한 이야기와도 이어질 것 같은데,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적으로 과거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나 성 소수자,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렇다. 논픽션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겼던 체제나 현상을 깨뜨리는 증언을 담는 것이다. 

은유:<멀고도 가까운>에서 가장 좋았던 건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독자를 말하는 주체로 끌어낸다. 솔닛:그 부분이 내가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했던 바다. 내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연결하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 

ⓒ민음사 제공 8월26일 민음사 주최로 열린 ‘페미데이’에 참석한 리베카 솔닛(마이크 든 이)이 ‘공적 공간을 걷는 여성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은유:어머니가 딸에게 가하는 억압은 쉽게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책에 나온 당신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를 통해 여성들이 자신과 어머니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아들은 곱셈이고, 딸은 나눗셈”이었던 경험 같은 것들이다. 

솔닛:<멀고도 가까운>은 내가 쓴 책 중 가장 여성주의적인 책인데, 서평 등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많이 읽히지 않았다는 게 흥미롭다. 최근에 한국에서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고 들었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여성혐오를 페미니즘을 통해 극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는 여성으로서 남성보다 더 열등한 지위, 제대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고통받았지만 또 그걸 나에게 물려준 측면이 있다. 그게 내 지난 50여 년의 삶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는데, 이 책을 쓰면서 극복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어머니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계와 어머니의 고통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보게 됐고, 어머니와의 긍정적인 경험들도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은유: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걷기의 인문학>은 20년 전에 쓴 책이다. 새로 보낸 서문에 한국의 ‘촛불혁명’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솔닛:걷기의 힘을 볼 수 있는 사례는 역사에 고스란하다. 근간에는 아랍의 봄이 그랬고, 한국의 촛불혁명이 그렇다. 공적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증거다. 100만명이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 모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걷기를 통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에는 분명 가치가 있다. 

은유:촛불집회는 공적인 감각을 몸에 새기는 경험이었다. 당신은 낙관적인 것 같은데, 광장에서 진보적인 구호를 외치고 현실에서는 보수적이고 위계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처럼 민주주의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괴리가 생기더라. 솔닛:광장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이 평등을 경험했길 바란다. 이를 통해 위계질서를 거부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특히 가정의 영역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공적 영역에서 이룬 경험이 사적 경험으로 스며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은유:싸워야 한다는 건가?(웃음) 솔닛:경험이 전염성을 갖기를 바라는 거다(웃음). 

은유:정권교체라는 큰 과제 앞에서 젠더 이슈는 뒷전이 된다. 여성 대통령에 대한 여성혐오 발언이 나왔고,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 줍느냐’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남성중심성 앞에서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솔닛:미국에서 힐러리에 대해 사람들이 보여줬던 반응과 굉장히 유사하다. 물론 힐러리는 젠더와 무관한 이슈로 싫어할 만한 이유가 많이 있지만(웃음). 삼성의 이재용도 보자. 그 사람이 비리를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남성’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남성은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모든 남성의 대표로 취급되지 않지만 여성 한 명의 잘못은 모든 여성의 잘못이 된다. 젠더를 기반으로 해서 여성 정치인에 대해 폄훼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트럼프는 가부장제의 모든 해악을 대표하는 존재로, 남성을 대표한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웃음).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줄리언 어산지를 보면서도 느끼지만,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가 중요하긴 한데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 여성 이슈 중요하지. 근데 아직 너네 차례 아니니까 저 뒤에서 기다려.’ 이런 느낌이랄까? 가부장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가 싸워온 시간은 아직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은유:말씀하신 것처럼 여성은 계속 사적 존재, 보조적 구실로 취급받아왔다. 그러다 보니 공적 자아에 대한 공포가 큰데 한국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많은 여성들이 공적 공간에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솔닛:한국에 와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한국 여성들은 지난 몇 년간 아주 훌륭한 일들을 해왔다. 노력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변화가 더딘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거다. 여러분이 바꾸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오래, 깊은 뿌리를 가진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남성에게 가정과 일을 다 건사하고 있느냐고, 잘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일·가정 양립’은 당연히 아내 몫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그런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이슈들을 계속 공론화하길 바란다. 절대 포기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