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4.23] 몰락의 에티카, 그가 누웠던 자리 (6)
  2. [2010.09.07] 거리의 고통을 사랑하라 (10)

몰락의 에티카, 그가 누웠던 자리

[올드걸의시집]

421. 시세미나 시즌2 마지막 시간. 봄비 가열차게 내리던 밤.

우리는 아름다운 몰락을 위해 <몰락의 에티카>를 읽었습니다.

 

감기와 시험 등으로 개별적인 몰락을 통보한 바람도리(은미), 단단, 한준이 빠진 빈자리. 오랜만에 형호씨가 등장했습니다. 혜진, , 소영이 가로등처럼 환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주었고요. 소설과 시 두 마리 토끼를 모는 문학의 여신 은재와 정란공교육의 현장 감각으로 시수업의 핵심을 짚어주시는 로코코 고은, 그리고 웃음과 활력에너지 원천 공대생 예술인 두부가 함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날도 어김없이 홍차 캔음료 데자와를 든 어린왕자 규빈이 간신히 착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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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노라.

몰락이 아니면 달리 살줄 모르는 자를.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애피그램으로 쓰인 구절이고 출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입니다. 아마도 니체의 요청에 가장 부합하는 삶을 산 사람이 아닐까 싶은 시인 이상의 평론글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상은 건축가 출신 시인입니다. 영화 <은교>에서 엄청 디스 당하는 공대생이 (문학에 대해) 뭘 알아?” 할 때 그 공대생 시인입니다.ㅋㅋ 수학과 작도를 배운 건축가의 시선. 설계도와 조감도 그리는 법을 배운 그는 도시 산책자이기 전에 이미 도시 설계자이죠. 백화점과 미로 등 근대 공간을 해체하는 작업은 당대의 일상적인 통념을 해체하는 작업과 나란하다는 것을 확인해나갔습니다. 오감도 제11의 아해가 무섭다 그러오...이 반복적 구절에 대한 반복강박에 대한 혜진샘의 문제제기로 잠시 설왕설래. 막다른 골목을 향한 편집증적인 질주(강박)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반복강박의 표현같다로 논의가 모아졌고요. 왜 똑같은 문장을 계속 쓰느냐고 말하던 두부는 낭독하더니 시 너무 좋다고 정서감염 증세를 나타냈습니다. 이상의 시는 낭독을 해야 제맛이 우러납니다.

 

미로는 뚫린 골목이지만 막힌 골목이라는 역설의 확인. ‘출구 없는 식민지시대 폐병 3기 지식인에게 모든 길은 뚫린 골목이자 곧 막힌 골목인 미로였을 것이다에 밑줄 긋고. 마가쟁 드 누보테에서 백화점의 화려환 외관을 괄호치고 그것을 설계도로 해체시켜 부조리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놀라운 시를 낭독하고 이상의 천재성에 또 감탄하고 그것을 읽어낸 신형철의 천재성과 성실성에 또 박수치고 그랬습니다.

 

슬퍼? - 슬플밖에 -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이 구절은 왜 이렇게 가슴 먹먹하게 좋은가요. 생활인 김해경과 시인 이상의 분열.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미끄러지다가 아름답게 몰락한 사람. 혜진샘은 이상에 대해 자의식 과잉의 지식인 아닌가 못마땅한 심기를 살짝 표현하였고 정란샘은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고투로 보인다며 옹호했습니다. 은재샘은 조감도가 원래 오만하고 폭력적인 시선인데 이상에게서는 그런 점이 안 보인다고 했고, 소영샘이 이상의 시는 전위지만 불편하지 않다, 어떤 나이 어린(!) 등단 시인의 시를 읽을 때의 그저 감각적인 시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얘기했고 이를 계기로 감각, 감성, 감정. 정서, 정동 등에 대한 민이의 날카로운 해석을 주축으로 논의가 오갔습니다. 자의식이 나쁜 건 아니다. 과잉이 문제다. 그런 얘기도 함께. 

 

2부의 주인공은 윤동주. 휴머니즘 철철 넘치는 그의 시를 읽고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가. 그런 어렵고 진지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누구한테든 고민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들을 수밖에 없어서 듣는 것인데. 고민을 들은 자가 앞에서는 공감포즈를 취하고 뒤에 가서는 딴 소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하고 또 들어야한다. 이 귀한 결론을 막내지만 언니 같은 소영이가 내려주었고 다들 크게 공감했습니다. 윤동주의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서 눕는 미묘한 머뭇거림이 참으로 겸손한 윤리적인 포즈가 아니겠느냐. 경선은 그 대목에 필이 꽂혀서 미묘한 머뭇거림 느껴보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

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

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자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

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

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병원>

 

 

윤동주의 시 두편. 팔복병원에 나오는 핵심어. 슬픔과 아픔의 차이가 뭘까. 신형철이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고 했는데 저는 아픔이 먼저고 슬픔이 나중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은재가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 보면 처음에는 슬프고 그들의 구조적인 삶을 인식하면 아픈 거 아닌가 예시를 들어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로코코의 경험담이 봄비로 촉촉해진 우리의 심금을 울렸지요. 연애하기 전에도 무시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쓰긴 썼지만 진짜 느껴본 적이 없는데 연애할 때는 슬프면 정말 (앙가슴을 만지며) 여기가 아프더라며 아픔을 느껴보았다고 했지요. 정란의 부럽부럽 모드. 그 얘길 듣고 보니 자신은 연애하면서도 아픔을 느껴본 적이 없는 거 같다고 시무룩하게 말했습니다. 슬픔-아픔 이야기에 물이 올라 저는 문득 <슬픈 아픔>이란 노래를 떠올렸고 스마트폰으로 즉흥 감상했습니다. 풍부한 기타사운드에 감성은 더 몰락의 길을 가고.

 

슬픔 층위까지는 자주 이르지만 아픔까지는 가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느니.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거 같다, 아픔의 정서를 촉발하는 사람이 고귀한 인연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는데 로코코님이 어느 평론가 교수님 얘기 들려주셨어요. "좋은 비평은 기분 나쁘게 하는 게 아니라 아프게 하는 비평이다."고 하셨답니다. 살짝 비틀어봐도 좋은 말이 되네요. 좋은 인연은 화나게 하는 게 아니라 아프게 한다. 그러니 정서적 층위에서 육체적 층위까지 육박해오는 파동으로서 아픔을 느낄 기회를 마다하지 말아야합니다. 아플 수 있을 때 아프자.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윤동주 시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아픔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물꼬를 터준 신형철-책에 감사했고요. 요즘 복고취향으로 선회중인 제가 서정주를 친일파라고 미워했는데 모국어를 너무 절도 있고 아름답게 쓰더라고 감탄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저의 요청에 따라 문학소녀 소영의 <귀촉도> 암송으로 장장 4시간 시담의 막을 내렸고 시즌2도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신형철이 말하는 몰락의 윤리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눕는 일이 아닐까, 시를 읽는 일도 누군가 누웠던 자리에 가서 슬며시 누워보는 미묘한 머뭇거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모두 26권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나란히 누워주고 머뭇머뭇 느낌을 나눠준 친구들, 많이 고맙고 많이 사랑합니다. 스치듯 만난 인연들도 어쩌자고 그립습니다.

 

 

 

** 수유너머R 시세미나 2주간 방학합니다. (4월 28일, 5월 5일 세미나 쉽니다)

** 시즌3 미래파 시인 편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도시에 서다는 조만간 일정표 올리겠습니다.

** 512일 토요일 6. 첫 시간에 이장욱의 <정오의 희망곡>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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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고통을 사랑하라

[글쓰기의 최전선]

월악산 자락으로 짧은 여름휴가를 갔다. 남편 친구가 빌려준 펜션을 거점삼아 강으로 산으로 하루씩 다녀왔다. 낙동강 지류 어디쯤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아이들은 커다란 나룻배 모양 튜브를 빌려서 타고 놀았다. 나는 물이 무릎까지 닿는 바위에 걸터앉아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깎아지른 절벽과 그것을 와락 껴안은 듯한 초록빛 강물의 절경에 심취해있었다. 덕윤이가 노를 저었다. 겁이 많은 꽃수레는 반은 웃고 반은 굳은 채 앉아있었다.  

오빠에게 천천히 하라는 둥 뭐라고 쫑알쫑알 말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후 보니까 배가 저만치 흘러가 있었다. 물이 ‘결코’ 깊지 않았다. 안전선 부근에서 노는 성인남자들 얼굴이 강물 위로 쏘옥 나와 있었다. 그런데 배가 자꾸 멀어져갔다. 아들 녀석이 방향을 틀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노를 빼려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배에서 내리려고 몸을 틀었다. 우왕좌왕 안절부절. 그러는 와중에 배가 좌우로 기우뚱 흔들리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꽃수레는 사력을 다해 울기 시작했다.  

다급했다. 뭔지 모를 공포가 엄습했다. 꽃수레는 수영도 못하고 키도 140센티밖에 안 된다. 갑자기 잔잔한 강물이 검은 혀를 날름거리는 파도같았다. 소리를 질렀다. “저 배 좀 잡아주세요.” 멀었다. 아무에 게도 가 닿지 않는 외침. 점점 물살이 거세졌다. 발을 내딛는데 내 맘대로 보행불가였다. 깊은 수렁. 물살이 본드처럼 내 몸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나를 저지했다. 애들이 점점 떠내려가는데 난 어찌하지 못했다. 샛노란 튜브배가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할 기세였다.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 순간 어떤 여성이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 애들 좀...” 크게 손짓을 했더니 다행히 그녀가 배의 끈을 잡고 끌어다주었다. 꽃수레를 얼릉 품에 안고 물가로 걸어나왔다. 어른들이 부담 없이 노는 유원지이다. 하지만 겁의 여왕인 나에겐 수심 2미터의 깊이로 느껴졌다. 약 1분간의 소동이 1시간처럼 길었다. 표준시공간을 초월하는 감각으로 다가온 사건. 나중에 보니 내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물속에서 버둥대다가 바위에 부딪친 모양이다. 결심했다. 다시는 강물에 발 담그지 않으리.  

태풍이 닥친 날. 바람소리에 눈이 떠졌다. 만화에 나오는 찢어진 눈이 달린 악마의 바람이 문 앞에 닥친 듯했다. 창문이 미친 듯이 덜컹거렸다. 꽃수레가 잠에서 깨었다. “엄마 무슨 소리야? 우~ 우~ 공룡 울음소리가 자꾸 들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밖에서 와장창 소리가 났다. 유리가 깨졌다. 폭포같은 파열음. 칼끝처럼 날카로운 울림. 충분히 오싹했다. 꽃수레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무서웠다. 둘이 꼭 껴안았다. 엄마와 딸이 아니라, 조난당한 두 사람은 체온을 나누었다.  

영원할 것 같던 바람이 잦아들고 날이 밝았다. 베란다 창문 하나가 산산조각이 났다. 한 조각도 남김없이 모조리 유리가 떨어졌으며 창틀 고무까지 야무지게 빠져버렸다. 바람이 불어 베란다에 떨어진 유리가루가 거실까지 날아들었다. 남편이 낑낑대며 치웠다. 난 망연자실 한참을 서 있다가야 움직였다. 거실을 쓸고 닦는 동안 발바닥에 작은 유리가 박혀 피가 흘렀다. 유리 파편과 빨간 핏자국이 엉켰다. 영화에 나오는 폭격 맞은 집. 아수라장 전쟁신이었다. 삼사일 동안 그렇게 닦았어도 아직까지 해가 들면 어디 숨어 있던 유리가루가 보석처럼 반짝 빛을 낸다.  

안양천 주변도 난리더라. 나무의 곧은 절개는 어디가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잎의 형상으로 처참히 쓰러진 늙은 수목들. 그것을 보고서야 난 태풍이 ‘큰 바람’이라는 걸 난생 처음 깨닫는다. 김소월의 시 <초혼>에 나오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할 때 그 ‘산산이’가 얼마나 처절한 감정의 해체인가를, 마루의 유리가루를 닦으며 비로소 실감한다. 여름날 물놀이 헤프닝을 통해 '강'을 배운다. 강물에 휩쓸려, 물살에 떠다니는 돛단배처럼, 폭풍우에 휘말리듯,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등등의 생생한 의미를. 김수영의 말대로 '느낀다'는 것은 정말로 느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기형도를 생각했다. <입속의 검은 잎> 첫 장에 나오는 시작메모.

나는 한동안 자연의 무책임한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이 글귀를 너무도 좋아해서 국민교육헌장처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어휘에 매료된 무책임한 동경이었다. 살면서 이런저런 비유를 대수롭지 않게 썼던 것 같다. 심상한 듯 작용하는 자연의 그 어마어마한 힘도 모르고 '거리의 고통'도 없이 말이다. 거리의 상상력이 곧 글의 힘이다. 일상의 크고 작은 재해가 많이 닥칠수록, 세상과 마찰할수록 글쓰기는 윤택해진다.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뀌(신형철)지 않고서는 삶의 통찰을 얻긴 어렵기 때문이다. 벼락같은 표현, 진솔한 울림을 주는 글은 몰락, 그 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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