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니체인가

[니체의답안지]

# 어느 날, 니체

그날도 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양호했다. 습관처럼 샀고 한달음에 봤다. 본문에 인용된 숱한 멋진 말들은 삶에 지친 나를 위한 처방전 같았다. 원문이 욕심났다. 한약 짓는 기분으로 니체 전집을 질렀다. 딱 녹용 한 재 값인 삼십여 만원을 결제했더니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니체 전집 21권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한 페이지를 채 읽기가 어려웠다. ‘무리수를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두길 두어 달. 오랜만에 들어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마침 니체 강의 공지가 떴다. 수업을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외국어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심 어려웠다. (그 강의는 자퇴생 및 행불자가 속출했다) 수업시간이 괴로웠다.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어색하고 외로웠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견디면서 누렸다.

자주색 하드커버의 무거운 책.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에 움찔했다. “도덕은 지금까지 삶을 가장 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고, 삶에 독을 섞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근면이 도피책이고 도덕이 독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당해 시들어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낙타 같은 날들이 스쳤다. 정확한 뜻과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니체에게서 거대한 사유의 전복이 이뤄지고 있음을, 갈피마다 행간마다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체, 멋스러운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의 언어가 춤을 추고 있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정념 과잉의 언어. 생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말들.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포리즘은, 그대로 시였다 

# 삶을 위한 시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 이거였구나! 아이들 둘 키우고 집필 노동하면서 거기다가 공부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보니 등골이 휘는, 서른 후반 나의 존재론적 뒤척임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백 년 전 니체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에 팍팍 꽂히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는 말은, 살아있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힘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는 니체가 창안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니체는 이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규정했고 힘 관계로 생성을 설명했다.

니체는 하룻밤에 읽는혹은 ‘30분 만에 읽는으로 요약 불가능한, 그렇게 읽고 싶지 않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처럼 순수와 영원을 탐구하고 개념의 금자탑을 쌓으면서 일상과 멀어지는 사유가 아니라 이 아수라장 세속의 장을 특유의 문체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키에르케고르 말대로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결을, 니체는 감히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태도는 또 얼마나 모던한가.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들을 추구해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 니체는 진리의 노예이길 거부했다. 절대 진리는 없으며 진리가 힘을 갖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진 것이 진리라고 했다. 삶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고 말하는 니체는 뼛속까지 삶의 철학자. 그래서 이 세계를 거부하고 저 세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도덕을 비판하면서 신의 죽음을 고지한 것이다.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의 죽음은 중요했다. 니체가 말하는 은 그리스도교 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에 복무하기보다 삶에 군림하는 도덕, 종교, 철학, 과학, 국가, 돈 등 이 시대의 모든 자명성을 으로 아우른다. 즉 니체에게 의 반대개념이다. “신이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신을 부정한 니체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친절히 안내한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은 아니다

# 니체와 글쓰기

니체 철학을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구도로 접근하니 텍스트의 초점이 조금씩 맞춰졌다. 니체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바로 이것. ‘삶에 대한 옹호이다. 그래서 삶은 질병이고, 철학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니체는 비판하면서 본능에 대적하는 삶은 하나의 병증일 따름이라고 일갈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나의 본능, 나의 욕망, 나의 충동에 관심이 쏠렸다. 충동을 억누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고급한 충동으로 고귀한 욕망으로 신체를 잘 가꾸어야 건강한 삶이 가능함을 배웠다. 이러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무지, 나의 삶의 무능을 통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며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하는 짐승이라고 일찍이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벌레였다’)

나부터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일들에 휩쓸리다보면 내 정신은 뒷전이다. 주위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내 정신으로 살기보다 사장님 정신, 학원장 정신, 목사님 정신, 연예인 정신, 보험설계사 정신 등 각종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신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하고 계획한다.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처방.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은 위대한 경멸을 촉구하는 언설들로 가득하다. 낡은 습속들. 헛된 열망들. 오랜 집착들. 내 것이 아닌 판단들을 모조리 태우라는 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삶이 불만스러울 때, 이 삶을 다시 살고 싶을 때, 니체의 표현대로 과거라는 돌덩이를 굴릴 수 없어 답답할 때, 나는 글을 썼다. 니체가 일러준 두 가지 가치평가의 척도. 자기보존인가, 자기초극인가. “그냥 살지?” “한번 해봐?” 두 마음의 난투극을 지켜보았다. 쓰면서 물었고 쓰면서 버렸다.

어쨌든 쓰고 나면 삶에서 집중해야할 문제들이 선명해졌다. 니체에게 훔친 아름다운 표현 하나, 문장 한 줄 벽돌처럼 끼워 넣고 싶어서 사유의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렇게 니체와의 글쓰기는 파괴-창조의 유희를 선사했다.

 # 철학적 오페라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초인, 즉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감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를 자기초극의 운동성으로 이해했다. 어떤 우월한 사람이 구현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를 돌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로 말이다. 니체는, 그리고 글쓰기는 짧은 보폭이라도 나를 넘어서는 과정에 기여했고 삶의 벡터를 조금씩 틀어주었다. 내가 니체라는 연료를 넣지 않았더라면, 글쓰기라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통장은 텅 비었으면서도 짭짤한 연봉의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공부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은 일, 번듯한 학위도 내세울 경력도 없으면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일, 니체를 읽고 글 쓰니까 좋더라며 손 내민 일...그렇게 용기 내어 나를 떠나는 일이 아니었으면, 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보임러)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다르게 말한다. “언젠가 하인리히 본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처음 <차라>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뿐이거늘이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진하게 그어두었다. 그 문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이 유행가 가사에 기대듯이 나는 니체의 말에 위로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니체가 죽음의 설교자들에게비난하는 말이었다.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이라는 둥 삶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말을 퍼뜨리면서도 그 한낱 고난의 연속에 불과한 생을 끝내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다고 조롱한다. 나중에서야 그 뜻이 보였다.

니체의 말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따라, 체험에 따라, 욕망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다른 게 보인다. 그것이 묘미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시선과 대화와 감성이 어우러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가, 들뢰즈 말대로 철학적 오페라가 되리라 기대한다.

 

* 어쩌다 니체를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 니체가 어떻게 나의 글쓰기를 자극했는가에 관한 고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을 시작하며 써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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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말라르메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비포선셋책방]

나는 의미란 게 정말로 시에 덧붙여진 어떤 것일까 여러 번 의심했다. 나는 우리가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시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점을 사실로 알고 있다."

 

어느 책에선가 보고 베껴놓은 문장이다. 어떤 글을 읽고 뜻도 모른 채 압도당할 때 가장 행복하다. 사고하지 않는 그 바보같은 상태에 빠지는 게 좋다.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순간. 그것은 절정 체험이랄까 -.-; 머리가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가슴이 반응하는 거다. 황현산의 문장들은, 나를 종종 찰나에서 심연으로 이끈다. 말라르메 <시집>을 읽는데 황현산이 5년간 고심했다는 번역과 해설이, 말라르메의 시보다 더 감동적이다. (말라르메 시도 물론 정이 들려는 중이다. 더 여러번 읽어봐야할 것 같다. 처음엔 공부하듯이 무슨 시를 읽는가 싶기도 하지만, 잡지 보듯이 한 번에 쓱쓱 이해하면서 시를 읽는 것이 이젠 더 이상할 지경이다.)

 

좋은 책은 반드시 서문이 훌륭하다. <시집> 역시 시적이다. 책에 대한 안내, 말라르메에 대한 이해에 도움 받았다. 아주 어렴풋이. 필사하고 싶은 문장들 정리해보았다. 발췌 요약은 예전에 자주하던 짓인데 올만에 해봤다. 쓰는 순간 휘발될 것이 분명하지만 쓰는 동안이라도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 같아 좋다. 내가 쓸 수 없는 문장, 쓰다듬고 만질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말라르메의 시 쓰기는 실존의 고행이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다음은 황현산의 글을 정리한 것.

 

 

* 말라르메의 자리

말라르메는 프랑스 시 역사에서 가장 난해하고 형식적으로 가장 완벽한 시를 쓴 것으로 평가되는 시인. 시는 말라르메의 절대적인 목표였고 생애의 사건 전체이기도 했다. “그는 시간 밖에서 시를 썼다.”(시트롱) 현재의 인간이건 미래의 인간이건 인간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품 그 자체의 논리에만 의지하여 그것을 완결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편집적으로 몰두했다. 36년 동안 완성한 시 작품이 70편을 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볼 때 말라르메는 보통 환멸의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후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인이다. 낭만파 문인들은 신과 우주의 섭리에 역사적 진보의 원리를 대입하여, 인류 해방의 이상을 전파하는 일이 시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고결한 이상을 품고 비천한 사회에 등을 돌리도록 저주받은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시는 현실을 부정하는 독백이 되었다. 말라르메는 이 환멸의 부정적 효과에서 언어 소통의 새로운 힘을 발견해내고, 독백과 그 표현법인 은유를 시의 운명이자 사명으로 여기는 가운데 새로운 시어를 창출했다고 흔히 평가된다.

 

* 무의 발견과 말의 소멸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자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근대 사회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역시 문제된다.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의 실상이 우연한 현상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한 그 우연은 섭리의 한 과정이고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다. 건강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병든 나무도 어떤 높은 의지의 표현이며, 활기찬 짐승과 죽어가는 짐승이 모두 제가 있을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 초월적 의지라는 것이 애초에 부재하는 것이라면 저 벌레 먹은 꽃이나 피부병을 앓고 있는 짐승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서구의 문화 전통에서, 시는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그 영감을 얻고 그 의지와 섭리를 옮겨 적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거기서 시인의 직업적 자부심이 비롯됐다. 신이 추방된 자리에 일반 물리학과 방불한 이성적 원리를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그 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섬세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인격신이 보장해주던 서정의 영감을 거기서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특권적 물질이지만, 그러나 그 생각이 진정한 것이라는 보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말라르메가 허무라고 일컫는 것은 신의 결여, 곧 말의 진정성을 보증해줄 장치의 결여라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리라. 결여는 진리와 미에 대한 확신 아래서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의 결여다.

 

그는 비천한 물질의 상태를 벗어나고 우연의 중첩일 뿐인 거친 현실에 도전하기 위해 시를 쓰려 하지만, 시의 언어는 존재의 필연적이고 고결한 양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보다 우발적인 사건들과 잡다한 감정의 결합에서 울려나오는 빈말이 되어버릴 위험에 더 많이 직면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말라르메는 지금 모든 낱말에서 그 경험의 침전물을 제거하고, 그 여유 공간을 삭제하여, 말이 그 지시체와 충만하고 순결한 관계를 맺게 될 어떤 지점까지 시구를 파들어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실망스럽고 비루한 기억으로부터 그 사물을 최초의 순결한 모습으로 구출한다는 뜻이다.

 

이라는 말이 한 번 발음되고 소멸할 때, 우연하게 꽃의 모습을 둘러쓴 모든 물질의 꽃, 다시 말해서 현실의 꽃에 대한 모든 실망스런 기억이 함께 소멸하고 꽃이라는 생각만이 솟아올라야 한다. 꽃이면서 동시에 꽃의 부재인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데아는 순수 지성의 산물이지만 말라르메의 관념 그 자체는 우리의 물질 감각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순수관념은 끝없이 지성화 하려는 감성과 매 순간마다 감성화하려는 지성을 투명하게 결합하려는 열망이 있다. 말라르메의 시어가 노리는 순수 관념은 최소한의 육체적 계기,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유지한다.

 

* 순수 지성과 시인의 소멸

난해어법은 말하면서 말하지 않는 어법, 다시 말해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다르게 말하더라도 그 역시 아니다라고 말하는 어법이다. 말라르메가 불교를 알지 못하면서 불교적 에 도달했다는 말은 필경 반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승들의 문답법이야말로 지칭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언어의 논리를 무참하게 잘라내는 어법이 아닐까. 말라르메에게 중요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그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 부정되는 그 말들의 효과에 있다.

 

네가 꽃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꽃을 보았다면 너는 그저 그런 꽃 한 송이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네가 정말로 무심한 상태에서 그 꽃을 보았다면 너는 우주의 한 얼굴을, 지극히 작은 얼굴이지만, 본 것이다. 말라르메에게서 낡고 우연한 관념들을 차례로 부정하고 색조와 선율로 하나의 인상이 되려는 이 시어의 지평선에서 순수 관념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언어의 고행은 실존의 고행이다.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상태에 놓인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운문의 위기)

 

*대문자의 책과 시집

세계는 하나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책. 오직 내부의 질서가 존재할 뿐 바깥이 없는 책이다. 말라르메만큼 자신이 쓴 책으로보다 쓰지 않은 책으로 더 유명해진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책에 신념을 걸고 백지에 앉아 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발견된다. 불가능한 기획이 마침내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념이 아니라, 적어도 그 기획에의 천착이 자신의 시 쓰기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 깊이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신념이다.

 

실현이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책의 개념은 그의 시 쓰기 속으로 들어와 내적 비평의 기능을 했으며, 사물과 생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열망을 실현된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이기 이전에 포기될 수 없는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시는, 패배를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

들뢰즈가 쓴 <니체와 철학>에도 말라르메와 주사위가 나와 찾아보았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말라르메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현실부정적인 태도가 니체랑 반대되는 것은 알겠다. 말라르메는 부정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시인. 니체는 즐거운 학문을 하는 긍정과 생성의 철학자니까. 다음은 알듯말듯 심오한 들뢰즈의 말.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했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를 우연과 필연이 두 항으로서 서로 대립하는 식으로, 후자가 전자를 부인해야만 하는 식으로, 전자가 후자를 실패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라르메의 시가 세계의 이원성이라는 낡은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연은 부인되어야만 하는 현존과 같고, 필연은 순수 관념 혹은 영원한 본질의 특징과 같다.

 

그러므로, 주사위 던지기의 마지막 희망은 어떤 성좌가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 필연을 책임질 때, 그것이 어떤 다른 세계 속에서 그것의 이해 가능한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성좌는 주사위 던지기의 결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의 한계로의 이행, 혹은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다.

 

말라르메에게서 예술 작품은 <정의롭지만> 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하는 비난하는 정의이다. 그와 반대로 니체가 현존의 미적 정의에 대해 말했을 때 삶의 자극제로서의 예술과 관련되었다. 즉 예술이 삶을 긍정하고, 삶이 예술 속에서 긍정된다.

 

말라르메는 주사위 던지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긍정하고 찬양하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고, 결백과 우연의 긍정으로부터 분리된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주사위 던지기는, 사람들이 거기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킬 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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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철학 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비포선셋책방]




# 무감각성, 무갈등성

한나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부제와 달리 내용은 재판에 관한 취재기사에 가깝다. 조금 지루하게 장대하게 묘사되며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한다. 악과 평범함을 조합시킨 이 강렬한 표현은 당시 큰 파장과 논쟁을 일으켰다. 요점은 이렇다. 한나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치전범 아이히만은 사악함이 전신에 흐르는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도 멀쩡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정의했다. 평범성banality은 진부하고 익숙하여 일상화되었다는 시간적 혹은 강도성의 의미가 아니라,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는 악의 편재성을 뜻한다. 

'악의 평범성'은 고병권이 쓴 <생각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사유하지 않음의 풍조와 그로 인한 폐단을 언급할 때 여기저기 꽤 자주 인용된다. 심보선 시인도 영화 <화차> 리뷰에서 인용했더라. 김민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깊은 성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친구도 자기와 같이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악이란 망각의 선택이고, 그 망각의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일 것이라는 얘기로 마무리했다. 좋은 글이다. 

그런데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무감각성보다 '무갈등성'에 가깝다. 악의 평범성은, 자기의 도덕적 감각과 살해행위라는 반도덕적 행위 사이에서 아무런 마음의 갈등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두 사실을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다르게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도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무사하고 우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악의 평범함은 무감각성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심리적 무갈등성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탈개인화와 언어문제다. 아렌트에게 도덕은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치전범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탈개인화한다. 그들은 자기를 '기계'로 바꾸고자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개인성이라는 일말의 요소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마지막에는 무개인이 아니라 비개인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어떤 개인을 전제로 하는 도덕적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제 오늘 보니 이정희도 자신을 탈개인화하더라. 정당조직정치의 한계겠지만)

또한 그들은 암호화된 특수언어와 일상언어를 구별해 사용했다
. 그들에게 언어를 특별하게 함으로써 일상적 감정이나 생각이 임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검열을 했다. 그들은 암호언어와 더불어 유대인 문제를 일상영역과 무관한 특별한 영역으로 대할 수 있었고 감정의 흔들림으로부터 임무를 보호할 수 있었다. 가령 유대인학살의 암호명은 최종해결책이었다. 이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언어는 인간 자신이다. 삶을 살고 그것을 언어로 직조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삶을 지시한다. 우리는 말로 이뤄져있다.

# 도덕과 합리성의 문제 

아렌트의 칸트 비판지점. 칸트에 따르면 한 사람의 올바른 행동은 그 행동원칙이 보편법칙을 따를 때 실현된다. 하지만 이 도덕적 절대명제는 아이히만에게서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파괴된다. 아이히만은 주장한다. 나는 보편법칙(국가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이 사실은 말해준다. 보편법칙의 합법성만으로는 도덕성이 구현될 수 없음을보편법칙이 절대명제가 될 때 개인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는 칸트의 도덕적 주체를 수정하고 소크라테스 이론을 따른다. 아렌트에게 도덕적 감각은 양심 같은 사적감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서적 도덕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것. 자기안에 들려오는 내적 정언명령을 따르는 도덕적 주체라는 얘기다. 이 주장은 아렌트 도덕철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개인의 도덕적 감각이 돌파구가될 때 아우슈비츠같은 역사적인 악은 양심 투철한 영웅의 출현으로 뚫어야하는  문제가 된다.

김진영 선생님은 도덕은 합리성과 무관하다. 합리적 도덕성은 보편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했다. 도덕의 극점에는 연민이 있다고. (이때 연민은 니체가 비판하는 값싼 동정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고귀한 감성이다) 그 예로 니체의 토리노의 말을 든다. 니체는 말이 쓰러진 것을 보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뛰어들어 눈물을 흘린 뒤로 광기에 빠진다. 이전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렇게 10년을 앓다가 죽는다. 우리가 연민을 느낄 때 그것이 단순한 정서일까. 어떤 대상을 보고 슬픔을 느낄 때는 이미 사유가 작동한다. 독일은 철학의 나라다. 독일민족은 합리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민이 없어서 아우슈비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 보아도 합리적인 사람이 연민적인 사람보다 더 악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니체가 그토록 독일민족, 독일적인 것을 비방하고 비판한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내가 니체에게 끌리는 이유도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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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사랑한 니체, 운명애

[니체의답안지]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삶의 저주받고 비난받던 면 또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얼음과 사막을 더듬는 방랑이 내게 제공한 오랫동안의 경험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제를 전부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내가 체험한 이런 실험-철학은 시험적으로 근본적인 허무주의의 가능성마저 선취한다; 그렇다고 이 철학이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멈추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철학은 그 정반대에까지 이르기를, - 공제나 예외나 선택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 - 이 철학은 영원한 회귀를 원한다 - 동일한 것, 매듭의 동일한 논리와 비논리를 원한다. 한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 삶에 디오니소스적으로 마주 선다는 것 - 이것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다. (니체전집 21. 16[32])



니체는 평생 질병에 시달렸다. 열두 살이던 1856년에 머리와 눈의 통증으로 김나지움을 휴학했다. 이후 내내 두통과 근시에 시달렸고 신체상의 통증이 없을 때는 자주 소화 장애와 우울증을 겪었다. 말년에는 발작 등 정신장애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어떤 날에는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1879년 편지)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나는 중병을 앓고 있던 때도 결코 병적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저서를 위대한 건강의 표현물로 칭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문건과 저서를 종합해보면, 니체는 질병을 변신의 기제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 명령했다. 병은 나에게 조용히 누워있을 것을, 여가를 가질 것과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병 속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보다 더 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이 사람을 보라>

가장 큰 고통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남들한테도 몰락하고 생성하라, 파멸하고 창조하라고 말하는 걸까. “하늘에 이르는 환호를 배우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비애를 각오해야한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고통기와 회복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고 사유를 벼려가는 한 철학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니체는 스스로를 의사이면서 환자인 나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가 위대한 건강이라는 명명을 얻어내기까지 겪었을 엄청난 고통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래도 살아야할 삶.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가, 수시로 물었을 것 같다.

니체는 왜 살았을까. 인간을 허무적 위험에 빠뜨리는 그리스도교 이성중심주의 이천년 철학역사와 한판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이것은 사는 이유다. 저마다 사는 이유는 다르다.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등등 경험적인 영역이다. 이렇듯 사는 이유(reason)가 상대적이라면 사는 원인(cause)은 절대적이다. 심연의 철학자 니체의 탐구영역은 사는 원인에 가 닿는다. 인간은 무조건 살아야한다는 것. 아니,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살게 되어있다는 것. 내가 살고자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산다. 내 이성이 아니라 몸이나 감정이 사는 방향으로 나를 미는 힘이 있다.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사유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며 신체적이고 본래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의 일이다.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신체다. 금기와 원죄의 영토였던 몸의 재발견. 생에 대한 놀라운 복구본능의 체험. 니체가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긍정의 철학 나아가 운명애를 말하는 것은, 질병과 동고동락한 그의 삶의 조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증과 울증의 반복은 상승과 하강의 변화무쌍한 문체로도 드러났다. 사실 자체는 없으며 해석만 있다는 니체의 말대로, 삶에서 좋고 나쁨은 어떤 지평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질병에 시달렸던 니체는 그 경험에서 얻은 이익을 이렇게 규정한다. 

"오랫동안 끔찍할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흐려지지 않는 병자의 상태가 인식의 획득을 위해 가치가 없지는 않다. 깊은 고독과 모든 의무와 습관에서 갑자기 허용된 자유가 수반하는 지적인 이익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더라도,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계를 내다본다. 그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이 보는,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저 보잘 것 없고 기만적인 매력들이 사라진다." <아침놀 114>

병을 통한 최고의 냉정함 회복한 니체는 또한 "수많은 종류의 건강상태를 거듭해서 통과하고 또 통과해야 하는 철학자는 그만큼 많은 종류의 철학을 뚫고 지나가게 된다"고 자신한다니체에게 질병은 순전히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개체의 파괴적 고통은 세계 전체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신체를 탄생시킨다. 


.... 어느덧 내일이면 니체글쓰기 수업 9차시다. 두번 남았다. 시원섭섭증이 도진다. 운명애를 주제로 강의안을 쓰는 중에 앞장을 가져왔다. 글을 쓰면서 새삼 놀란다. 니체가 삶을 긍정하라는 것은 고통을 긍정하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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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장정일 사이에서, 보다 먼 이웃사랑

[니체의답안지]

목요일은 니체의 날. 토요일은 시의 날. 금요일은 괄호의 날. 육신을 가로로 뉘이고 이 괄호 끝에서 저 괄호 끝으로 빈둥거리면 하루가 저문다. 그러는 사이 니체는 나고 시는 들고 그런다. 오늘은 장소를 바꿨다. 영하9도의 바람을 가르며 도심 이끝에서 저끝으로 배회했다. 교보문고에 가서는 시집 코너 앞에서 멍하니 있는데 어떤 시집 제목이 눈에 달겨들었다. 이름하여 <아니리> 이제 저런 장단에 감전되는 걸 보니 국악프로 좋아하던 엄마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싶어 야릇. 그래도 입에 감기는 어감과 가슴을 떠미는 듯한 회오의 정서가 좋아서 아니리, 아니리, 세번 말하여 아니리. 하고 중얼거리며 다녔다. 영화 보기 전 예상치도 않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햄버거를 먹게됐는데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으려고 그랬나 보다. 일년에 햄버거 먹는 경우가 한 두번인데. 장정일 '찌찌뽕~'

"쏟아지는 햇살 가운데 하얀 십자가 하나
롯이 세워질 때 나는 생각했다
신은 하늘에 있고 벽돌이 아무리 높아진들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이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과 근접한 구절.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좋구나. 니체를 읽어도 반니체적인 인간이 있듯이 니체를 읽지 않고도 니체를 사는 이들은 많다. 니체를 통과한 신체가 햄버거를 섭취하고 나니 장정일 시의 맛이 또 다르다. 맛있게도 냠냠. 

 -이상-의욕하지 않기, -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
, 이들 크나큰 피로가 나를 떠나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어제 수업에서 논의가 됐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다. 생명은 힘에의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창조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닌 것. 무기력증이 얼마나 '크나큰 피로'인가를 얘기하는 대목이다. 그런 얘길 하는데 '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말. 평소에 행복해야지~ 나는 잘 살거야! 다짐을 일삼고 그리 살아보려다가 등골 휘었기에, 니체가 "너무 의욕부리지 말아라"는 뜻인줄 알았다고. 크게 공감하며 밑줄을 그었다고 했다.

창조적 오독이지만 분명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우리는 '행복하라'는 지상명령에 심신을 혹사시키곤 하니까. 행복에 대한 강박만 있지 어떤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만의 욕망과 능력을 알고 나만의 행복을 만들어가지 못한다. 스펙 쌓고 배낭여행 가고 어학실력 쌓고 명품백 사고...행복이라고 규정된 사회적 모델을 추구하는 행위를 따르고, 외부인증에 의한 삶을 살다보면 정말 크나큰 피로가 덮친다. 그런 의욕하기, 노예적 의욕하기라면 아주 멀리 해야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는 없고 '자격증'만 남고 허탈하다. 이같은 반동적 허무주의에 휩싸여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것이 헛되다"며 삶을 놓아버리지 말라는 얘기를 니체는 하는 거다.   

장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빗댄 구절.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은 이웃사랑은 편협한 자기애의 표출이라는 것.  나를 가꾸기보다 이웃을 돕는 일이 더 표나고 쉬우니까 그리하는데 그 '타인지향적 헌신'의 정체는 알고보면 자기로부터의 도피 아니냐 니체가 묻는다. 이 구절도 오해하기 십상이고 실제로 초롱샘은 '이웃사랑이 왜 나쁜가' 물었다. 니체가 옆집에 떡돌리지 말고 등돌리고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웃과도 친하게 지내고, 조카 수학도 가르쳐야 한다. 다만 자기자장에만 맴돌기보다 조금씩 시야와 관심을 넓혀가면서 망원렌즈로 세상을 보자는 것. 수학 잘하는 이모를 두지 못한 아이들도 공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한번쯤 궁리해보자는 거라고 설명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 교육문제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생님들.이런 활동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대형로펌에서 기업인수합병에 관한 일을 하던 변호사가 참여연대 간사로 들어간 것도 자기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는 예를 들어주었다. 초롱샘이 물었다. "그분이 나갔다고 로펌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하다. 맑스가 자본론 써도 자본주의 건재하고, 안티조선 운동해도 조선일보 영향력 1위는 변함없고, 김진숙 고공농성승리해도 비정규문제는 남고, 한비야가 몇 십년 구호천사로 활약해도 빈곤아동은 여전하다. 그나마 그 미련한 사람들이 버둥거렸기에 99%는 저항한다고 말이라도 하는 거다.

우리 수업에서 아아님이 돌쟁이 애기 데리고 수업을 받는다. 강의신청 전에 묻길래 "된다. 해보자"고 했다. 니체수업이니까, 니체식으로 창조적인 우리만의 수업방식을 만들자고 했다. 공부는 원래 하고 싶은 사람들이 '길'에서 모여서 했다.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게 민주주의 학습이고 우연을 필연으로 삼는 법이니 다른 학인들에게도 좋겠지. 물론 수업시간에 아이가 떼써서 산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아님으로 인해 다른 아기엄마, 예비주부 학인들에게 공부의 물꼬를 터준 셈이 되니까, 그 또한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는 그리 어렵고 까다로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알고보면 소박한 남자;인데 잘난척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온갖 허무적 인간유형, 천민근성 쩌는 사람들, 니체의 페르소나로 나는 읽힌다. 그 충동들, 거친 열정들을 크나큰 덕으로 가꾸어 멋진 책으로 엮어냈으니 그 질긴 엉덩이의 힘이 부러울 뿐이다. 

학인들이 써온 과제 읽으면서 세상 살아가는 다양한 얘기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보다 먼 이웃에 대한 애정행위의 근간이 된다. 고3담임 학인이 쓴 어느 학생이야기. 소위 노는 아이이고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집안형편이 어려운데도 1학기에 야자를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학생 오빠 학비 마련 등을 이유로 2학기부터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부는 안 하면서도 '등교'와 '야자'에 충실한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뭘까, 왜일까. 한준샘의 해석으로 우린 그 아이를 이해하게 됐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 외롭고, 가족들 다 일하는데 나만 놀고 있으면 미안한데 일하기도 싫고, 그래도 학교에 가면 공부는 안 해도 친구는 있잖아요. 나 같아도 야자 할 거 같아요.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 니체를 읽으면서 니체바깥에도 눈 돌리라는 것. 장정일 버전으로 이거다.

 

"학교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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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함께 한 11월

[니체의답안지]

금요일 아침 커피가 달다. 목요일 저녁에 니체 수업을 끝내고 마시는 첫 커피이기에 그렇다. 어제로 2강이 지났다. 한 고개 넘고 바위에 앉아 쉬는 느낌. 발아래 출발지점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글쓰기 강의라는 발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일이다. 우월한 니체전문가 많은 연구실에서 니체강의 한다고 나서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다. 내 조건에서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인생,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설령 망해도 별로 나빠질 게 없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ㅋㅋ 위대한 사상과 수려한 문체의 원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밑줄을 긋고 생각을 뒤척이고 그 인식의 거울로 자기 삶을 비추어 글을 쓰고. 그러자고 공지를 내놓고는 조마조마했다. 누가 동조를 해줄 것인가, 과연...가을강좌 모집도 끝나고 연말이 다가오는 어수선한 11. 개강시점으로 참 애매한 때다. 근데 공부를 꼭 3월이나 9월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나의 준비가 그때서야 완료됐으므로 공지를 띄웠다 

참 이상한 기다림. 연애할 때 전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과 불안이 공존한다. 내가 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이 얄궂음을 당하는지, 며칠 동안 후회했다. 나를 외부에 개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폭풍마감은 아니고 가랑비에 젖듯이 열다섯 명이 찼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 글쓰기의 최전선 12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정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 강의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위안, 계속 헛살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허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차라투스트라 말고도 두꺼운 니체저서를 다시 뒤적여야했고 난해한 니체의 언어에 짓눌릴 때, 싸돌아다니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또 번뇌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 난리인가. 대충 살지, 나도 참 애쓴다... 근데 그 터널만 지나고 나면 또 반짝 살만했다. 빈대떡보다 더 자주 뒤집히는 마음. 대범함과 심약함의 진자운동.  

흔들리는 소리가 학인들 사이에서도 들린다. “, 이렇게 써도 되나요?” “이게 맞나요?” “니체 원전을 더 읽고 차라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요?”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삶을 강요해온 교육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은 니체를, 니체의 위험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론적 정합성을 따지고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모델을 찾으려는 열망을 갖고 있으면 니체는 영원히 잡히지 않는다. 니체는 자기의 사유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이단아다. 불친절함의 최고봉은 차라투스트라이고. 그러니 문학적 감수성과 독해력이 없으면 삶의 경험치가 적으면 읽기가 힘들다. 니체도 말했다. “차라투스트라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삶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몇몇 문장에 도취되지 말고 반드시 자기의 사유를 바꿔가는 방식으로 차라를 읽어야 한다고. 첫 시간에 제안했다. 나는 이 수업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경험과 인식과 지식이 어우러지는 철학적 오페라를 기대한다고 

거창한 출사표. 과한 의미부여가 때로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지식-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삶에 대한 나의 선호. 다른 세상에 대한 나의 눈물겨운 동경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어떤 책을 읽든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있다. ‘어떤 앎이어야하는가’ ‘나는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계보학 관련해서 푸코 책을 뒤적이다가 나의 원초적 물음에 응하는 빼어난 문장을 만났다.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성의역사2>







Chopin's Waltz Brilliante Op. 34, No. 1 in A Flat Major by Lang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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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니체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썼다"

[글쓰기의 최전선]

 
니체의 글은 시적입니다.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특유의 운율에 녹아있습니다. 짧은 경구와 비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풀어냅니다. 그것은 니체가 독자를 선별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 시적인 니체의 글은 내가 원한다고 읽을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물음을 가졌을 때만, 그 절실함의 강도만큼 문장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힐 것입니다. ‘나는 니체를 읽었다가 아니라 니체가 나를 습격해왔다! " 니체와의 만남은 내가 낯설어지는 체험이고 삶을 창조하는 실험입니다.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좋은 글쓰기 교과서입니다.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메시지, 치밀한 비유와 유려한 문체는 폭풍과도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 책은 실제로 출간 당시 고도의 문체연습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인간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내려온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니체철학을 살펴보고 나를 찾는 글쓰기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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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다음 날

[차오르는말들]

명절 전날, 그러니까 여친과 헤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받아들여. 이유를 따지지 마. 이 세상에 논리적 인과성을 비켜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 너처럼  헤어진 이유라도 알자며 매달렸던 인생선배들이 얼마나 처참히 버려졌는가를 예로 들며, 나는 연애사건을 포함한 '삶의 부조리'를 연신 설파했다. 내겐 그랬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부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현실로 닥쳤다. 여자에겐 결혼이 삶의 불합리를 체험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제도장치다. 순종과는 거리가 먼 인간유형인 나조차도 대 시댁관련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행한다. 생존본능의 발동이다. 제사나 명절은 일박이일 극기훈련 가는 기분으로 임하며 실제로도 혹독한 타자체험의 장이 펼쳐진다 

시댁은 그 자체로 모델하우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적재적소에 정물처럼 놓여있다. 먼지가 침입할까봐 베란다와 부엌 등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고리까지 걸려있다. 숨이 턱까지 막히는 적요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시어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주름 잡힌 정장바지를 입고 고상한 단추가 달린 셔츠를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물일을 하신다. 말이 없으신 시아버님은 늘 신문이나 책을 보며 시동생과 신랑은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시댁에 갔을 때는 이 장면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명절이라 하룻밤 자고 올 때는 빳빳하게 풀먹인 이불마저도 왠지 부담스러웠다. 행동이 부자유하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유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레알 감옥이었다.

위생종결자 시어머니의 살림살이, 특히 주방용 가재도구는 신상의 광택을 자랑한다. 수세미는 싱크대용, 냄비용, 일반용, 행굼용 등 종류별로 너댓 가지다. 처음엔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릇은 찬물로 닦고 뜨거운 물로 소독한 후 얼룩이 남았는지 형광등에 비추어본다. 다이아몬드 보석이 번쩍거려야 싱크대에 들어간다. 신혼 때 설거지 불합격 판정을 몇 차례 받았다. ‘결혼 전에 배우지 못했구나!’ 난데없는 모녀 비하발언에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어느 해 명절에는 유학 간 후배 두 명에게 연달아 국제전화가 와서 자리를 비웠다가 시댁에 와서 일은 안 하고 전화만 한다는 뒷말을 들었다. 온통 불가해한 상황. 무기력했다. 시어머니의 도덕적 판단은 나의 경험세계 외부의 영역이었기에 그에 대응할 어떤 언어도 찾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명절이면 무슨 직장 상사와 숙박면접을 보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날벼락은 명절 포함 일 년에 네 번 정도 국지성 호우처럼 지나갔다. 그 비를 쫄딱 맞고 나면 감기처럼 일주일을 앓곤 했다.

결혼 십년 지나고 이십년 가까이 되자 시어머니 기력이 쇠잔해지고 당신이 몇 차례 풍파를 겪으면서 요즘은 비교적잔잔한 호수 국면이다. 청결감각은 여전하시다. 엊그제는 가만히 시어머니의 동선을 바라보았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흘러가는 동작들. 계란을 꺼내면 손을 씻고 싱크대 문고리를 잡고서도 비누칠해서 손을 닦는다. 후라이팬은 그렇게 자주 쓰는 데도 먼지가 앉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묶어놓는다. 전을 부칠 때는 기름이 튈까봐 바닥과 싱크대 조리대에 신문지를 깔고, 끝나면 걷어내고 재차 걸레질을 한다. 요리와 요리 사이, 베란다로 나가더니 위생장갑을 끼고 커다란 락스통을 들고 오신 시어머니 말씀하신다. “싱크대 소독해야 돼!” 나는 순간 시어머니가 마스크를 쓴 방역과 직원으로 보였다. ‘여자가 일 못하면 죽은 목숨이고 일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시어머니는 가사노동의 시간을 최대한 늘림으로 인해 자아존중감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덕분에 나의 명절 노동량은 많지 않다.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책을 보거나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옆에 서서 주방보조 노릇을 하며 시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야 한다. 명절날은 차례상을 물리자마자 전신 명품으로 치장하고 나타나는 친지에게 무상급식 투표율 60%에 빛나는 그사세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듣는다. 내용은 입에 금수저 물리려는 부모들의 영웅담과 승진과 출세담, 건강정보 등 온통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얘기다. 출생의 비밀과 불륜 드라마처럼 매번 재생산되는 이야기가 한없이 지루하다. 그렇다고 리모콘으로 끌 수도 없다. 귀 있으니 들려온다. 선택한 적 없고 원한 적 없는 그들과의 배치에서 내 의지는 교란 당한다. 한참을 듣고 있으면 세상이 낯설어진다. 신경질 난다. 나 혼자만 덩그마니 초라하다. 외롭다. 몰랐다. 크게 하는 일도 없는데 대관절 명절이 왜 피곤한가. 이번에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이 없고 할 수 있는 이 없어서 그런 거 같다수동성의 장에 던져진 채 의욕하지 않기’ ‘행하지 않기로 시간을 보내야 하니 극도의 피로함이 밀려올 밖에 

기름이 배이고 소란이 지나간 머리를 식히고자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설거지까지 마치고 밤 9시 집을 나섰다. 단지 앞 파스쿠치에서 갔다. 2층 창가로 플라타너스가 하늘거리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젊은 친구들이 혼자서 혹은 연인들이 기대어 앉아 노트북 켜고 공부하고 있다. 그 밤에 자리가 꽉 찼다. 겨우 한 자리 구해 앉아서 라즈베리차를 홀짝거렸다. 강력한 에어콘 바람이 살갗에 닿으니 세포가 탱클탱클 살아났다. 재치기가 나고 정신이 깨어났다. 공부하는 신체로 모드변환. <이 사람을 보라>를 폈다. 활자가 두 눈에 달려든다. 영혼을 상승시키는 니체의 말. 헤어져있던 애인과의 상봉처럼 눈물겹다 

무화가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을 터뜨린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불어대는 북풍이다. 나의 벗들이여, 무화과가 떨어지듯 너희에게는 이 가르침이 떨어진다: 이제 그 열매의 즙을 마시고 그 달콤한 살을 먹어라! 온 사방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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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4장 - 잠언과 간주곡

[니체의답안지]

4장은 짧은 잠언으로 이뤄졌다. 맥락에서 걸어 나온 한줄 문장을 해석하는 건 위험하고 부질없다. 그래도. 울림을 남기는 좋은 문장을 읽고 나누는 일은 아름답고 유용하다.   

65.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 안다는 것은 나의 무지와 편견과 빈구석을 아는 것. 그 손발 오글거리는 쪽팔림을 견디는 것. 자기를 알아가는 투쟁. 그것을 인식의 매력으로 표현하다니 니체는 대인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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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3장 종교적인 것 - 금욕의 두 가지 버전

[니체의답안지]

어디선가 신보다 신앙이 먼저 생겼다는 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보다 종교적인 것이 문제라고. 신의 죽음으로 종교는 사라졌지만 종교적인 것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는 것, 즉 우리시대에는 도덕, 과학 등이 ‘신 없는 신앙’으로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비판이다. 종교적인 것의 어떤 부분이 문제이냐 하면 희생, 금욕 같은 것들의 강조이다.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삶이 되는 가치전도.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을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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