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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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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간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 어느 겨울.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한 시간 가량 운전을 해서 집에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잠들고 나는 거실에 멍하니 있었다. 두 눈만 꿈뻑꿈뻑. 모드변환 중이다. 몸에서 식용유 냄새랑 트리오 과일향이랑 시어머니와 동서의 목소리가 빠져나가길, 다시 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댁에 다녀오면 왠지 늘 착찹하고 뒤숭숭했다. 목구멍에 잔가시가 걸린 이 느낌은 뭘까. 이건 증상이 아닐까. 일체유심조를 이루고자 반야심경을 읽는 심정으로 시집을 뒤적거리는데 문자가 왔다. 뭐하니. 그냥 있어. 술자리를 마치고 가는 길인데 뭔가 아쉬워서 연락했다는 그. 문득 마음이 동했다. 자기재건 본능인지 떠남의 욕망인지 모를 기습적인 충동이 일었다. 우리는 술꾼처럼 ‘딱 한잔만’ 하기로 했다. 그는 2호선 반대방향으로 갈아..
관계 / 고정희, 임태경 / 열애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
우리 동네 구자명씨 / 고정희 - 여성사 연구 5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고정희..
사십대 / 고정희 - 제 몸에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고정희 유고시집 창작과비평사 꽃단장 컨셉에 맞추느라 신발장을 지키던 7센티 정통 하이힐 신고 외출했다가 아주..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따뜻한 세상 한번'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을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짱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