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 넓어져가는 소란을 위해서

[은유칼럼]

(*영화의 줄거리가 많이 나옵니다.)

 

영화 <환상의 빛> 초반의 한 장면, 남편이 라디오 소리를 집중해 듣고 있다. 아내가 시끄럽지 않느냐고 묻자 남편이 답한다. 노인네 귀가 잘 안 들려서 크게 틀어놓은 거겠지. 알고 보니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온 거였다. 이것은 분명 ‘벽간 소음’의 일촉즉발 상황인데 영화에서는 라디오를 공유하는 다정한 이웃 풍경으로 그려진다. 소리로 연결된 관계? 이 때부터 난 영화의 ‘빛’보다 ‘소리’가 귀에 감기기 시작했다. 


배경이 기찻길 부근 주택가 가난한 동네다. 부부 사이 아기가 태어났는데 ‘기찻길 옆 오막살이’ 동요에 나오는 아기처럼 순둥순둥 잘도 잔다. 공장에 다니는 남편은 기계 굉음으로 아내가 창밖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에 매진한다. 퇴근 후 두 사람은 단골 찻집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다. 삶이 순조로울 때 일상의 소리도 왕성하다. 그러나 남편의 돌연한 죽음 후 삶은 어둠과 적막이 깃들고 아기의 옹알이만 간신히 일상을 지탱한다. 남편의 부재로 ‘음소거’가 된 듯한 일상은 어항처럼 조용하다. 


몇 년 후 아내는 재혼해 바닷가 마을로 거처를 옮긴다. 머리맡까지 파도소리 밀려오는 방, 두 번째 남편은 아내를 걱정하며 말한다. 처음에는 파도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잘 수도 있다고. 아내는 적응을 위해 노력한다. 마루 계단 닦는 소리, 파 송송 써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수박 씨 뱉는 소리가 무던한 일상의 신호음처럼 들린다. 그리고, 전 남편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도 유품이 된 자전거 열쇠의 방울 소리이고,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도 아내가 스스로 터뜨린 처연한 울음소리다. 


삶은 얼마나 많은 소리로 영위되는가. 돌이켜보니 난 삶이 서툴 때 세상이 내는 온갖 소리와 적대했다. 첫아이 육아기에는 (기차소리는커녕) “고장난 에어컨 테레비 컴퓨터 삽니다.” 하는 무한반복 트럭 방송에 아기가 깰세라 쩔쩔맸다. 글이 안 써질 땐 놀이터의 아이들 떠드는 소리는 물론이고 집안의 TV소리, 화장실 물소리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제거하고 싶은 난폭한 마음은 타자의 존재 부정이라는 과격한 상태로 치닫곤 했다. 


영화의 전개처럼 내 삶의 계절도 바뀌고 있다. 아이들이 크고 복닥거리던 집안이 조용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일상 소음의 한복판을 벗어나는 지금, 난 뒤늦게 삶이 내는 소리와 화해하고 있다. 트럭 방송을 켜놓고 운전석에서 잠든 아저씨의 하루 매출이 걱정스럽고,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들이 내뿜는 존재의 활기가 반갑다. 베란다를 타고 넘어오는 이웃집 부부싸움 소리가 불안했는데 요즘은 외려 조용하면 불길하다. ‘사람이 과연 살고 있을까?’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위해서”(‘꽃일2’) 라고 시인 김수영은 노래했다. 세상의 삐뚤어짐과 떠들썩함을 찬미하는 시구다. 가만히 있지 않고 부딪치고 충돌하고 어수선할 때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만드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영화 <환상의 빛>은 비탈길을 자전거로 낑낑대며 올라가는 아빠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넓어져가는 소란을 길게 응시하며 끝이 난다. 아까와는 다른 시간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다. 


이웃집 라디오 소리를 즐겁게 받아들이듯,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삶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이 영화는 일상의 소란이 환상의 빛처럼 삶을 감싼다.


-방통대 학보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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