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의 최전선

공부의 양과 삶의 맥락

평범한 여성들과 이야기하다보면 그들의 인식 능력과 지적 적용력에 놀라는 경우가 많은데 반면 전문직 종사자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 한다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한다. <페미니즘의 도전> 첫장에 나오는 일화다. 나도 글쓰기 수업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해보니 정말 그랬다. 넓은 의미의 주부들은 문학, 철학, 사회학 등 텍스트 이해가 빨랐다. 왜 일까. 

사회적 약자로서 정체성의 힘 같다.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림하는 건 타인과 부대낌의 연속이다. 불가해한 남편과 행복과 번뇌의 근원인 아이들. 시금치도 싫어지게 한다는 시댁식구들부터 이웃들까지 면면이 다 다르다. 그 모든 관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해석노동과 정서노동을 피할 수 없다. 

꼭 주부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돌봄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은 청년들, 감정노동을 멈출 수 없으며 불안을 안고 사는 부모의 다툼을 보고 자란 자식들 등도 ‘을’의 입장은 마찬가지. 억울한 것도 불편한 것도 복받치는 것도 많아 신경세포가 늘 예민하게 살아있으니, 빨간약처럼 스미는 문장이 많은 것 같다. 개념과 정황 이해도 빠르다. 

반대로 외부와 접점 없이 오직 학교에서 제한적인 관계를 맺고 공부만 한 사람, 주로 대접받아온 갑의 자리에 있는 전문직 종사자는 섬세한 감각을 다루는 예술이나 학문에 취약한 경향을 보였다. 슬픔, 기쁨, 분노, 전율, 울분 등 정서작용으로 인한 내면의 지층이 형성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이전에 해온 ‘공부의 양’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타인과의 접촉에서 자기 한계를 마주하고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얻어낸 생각들, 세상은 어떤 것이다, 사람은 무엇이다, 라고 정의내리고 그 개념을 또 수정해가며 만들어가는 자기 생각의 토대다. 자기 삶에 맥락이 있는 사람은 읽고 듣고 쓰면서 쑥쑥 성장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의 과정과 내면의 과정의 일치를 규명해가는 일이다. -김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