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닙니까?

[은유칼럼]





"당신은 부인을 여자라서 만났습니까? 나는 남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을 뿐입니다.”


지난 세기의 일이다. 1999년 KBS TV에서 <슬픈 유혹>이라는 단막극이 방영됐다.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파격적인 소재였고 나는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라서 ‘본방’을 사수했다. 저 대사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단 한 줄로 사랑의 섭리를 깨우친 거 같았다. 또 신기했다. 누군가 내 연애에 ‘태클’을 걸었을 때 나는 저렇게 근사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새천년 이후 스크린 안팎에서 동성 간 사랑을 자연스레 접했다. 남자사람 친구가 동성애자였다. 애인의 생일이라며 남성복 코너에서 셔츠를 살 때 외에는 일상에서 그의 성정체성을 자각할 일은 별로 없었다. <브로크백마운틴> <해피투게더> 같은 ‘게이영화’나 <안토니아스 라인> <에브리바디 올라잇> 같은 ‘레즈비언 영화’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사랑의 속성을 탐구할 수 있는 내겐 너무 좋은 인생수업 교재였다. 그리고 글쓰기 수업에서 치열한 자아탐색 끝에 ‘커밍아웃’에 이르는 동성애 학인들의 멋진 글을 더러 만났다. 


작년에는 신촌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 갔다. 입이 딱 벌어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당신이 만나는 의사는 게이입니다’ 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퍼레이드카에 올라간 언니 오빠들의 옷차림과 춤동작은 제대로 야했다. 망사와 깃털과 비즈는 기본 아이템. 인터넷 포털 화면의 단골 수식어 ‘아무나 소화 못하는’ ‘눈 둘 곳 없는’의 결정판이다. 


아니다. 차원이 달랐다. 음흉한 카메라의 시선에 포획된 특정 부위의 노출이 아닌 주체적이고 흥겨운 존재의 펼침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걸그룹의 노출이 관음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시청자를 길들인다면 그들의 벗음은 보는 사람을 낯설고 불편하게 함으로써 가치 체계를 흔들어놓았다. 너도 근엄하게 굴지 말고 좀 즐겨보란 듯 유혹했다. 


나는 이성애자(인 것 같)다. 정상인으로 분류되어 이땅에서 살아가기에 불편이 없지만 그래서 고민도 없었다.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성적 취향이 섬세한 성소수자들과 달리 나는 자기 성적 욕망에 무지하고 자기 표현에 무능하다. 그들과 있으면 그런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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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잠들지 않고 더 많이 질문하기 위해 그들은 서서 잔다. 
- 김승일 시 <선잠 자는 전봇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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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퀴어문화축제가 열렸고 나는 또 놀러갔다. 기쁨을 아는 몸들의 축제에 나타난 원한을 익힌 몸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작년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극악스럽다. 자발적으로 축제를 열어 즐기지 못하고 남의 축제에서 ‘훼방’을 놓는 저 부정의 영혼들을 보자니 <슬픈 유혹>의 또 다른 명대사가 떠올랐다. 직장동료가 커밍아웃한 주인공에게 너를 몰랐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나는 남자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고 하니까 동성애자 남자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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