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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노동의 배신, 4천원 인생, 위건부두 가는 길

<4천원 인생> <위건부두로 가는 길> <노동의 배신>을 르포수업을 위해 연달아 읽었다. 세권 모두 노동체험에 관한 보고서다. 2010년 대한민국 시급인생의 노동실태를 보여준 <4천원 인생>은 겉표지의 헤드카피대로 울면서 읽었지만 책장이 후딱 넘어가고 눈물도 금세 마른다. 수업시간에 어느 분 말대로 이렇게 빨리 읽은 책은 처음이다.” 나는 술술 읽히는 책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좋은 책이라면 독서중지-사유의 순간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이 책은 익숙한 내용이, 또한 필자가 기자들이다보니 정확한 의미전달에 주력한 단문 필체가 속도감을 높인다. <위건부두 가는 길>은 문학작품다웠다. 책장을 자주 덮어야했다. 좋은 문장을 베껴 쓰고 고개 들어 부러워하고 탄광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탄식하고 조지오웰은 이 순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지 그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동경을 보내고, 그러느라 오래 걸렸다.

 

<노동의 배신>은 그럭저럭 읽혔다한 장소에서 한 달을 살면서 과연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지, 그리고 다음 달 집세를 낼 만큼 돈을 모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저임금 노동에 투신하는 지식인이 저자이다. 목적을 세우고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 그것에 부합하는 것 외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노동 장면은 열심히 기술하고 분석하고 분노하지만, 나에겐 별반 정서적 반향이 없었다. (조지오웰 역시 작가로서 목적을 갖고 밑바닥으로 내려갔지만 그의 목적은 좀 더 크다. ‘노동자의 실태조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하는가의 렌즈로 성찰한다.)

 

<노동의 배신은> 2000년 전후 미국이 무대인데, <자본론>을 비롯한 억압과 차별을 다룬 모든 책이 그렇듯이 바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심지어 나는 주부로서 일련의 노동실태 묘사에서 크나큰 동질감을 느꼈다. 저자가 위장취업으로 청소용역 일을 맡아서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서 일하는 장면. 이를 테면 하수구 머리카락과 체모를 줍고 똥 찌꺼기 뭍은 변기를 닦고 식탁 밑에 들어가서 걸레질 하는 장면은 내가 매일 하는 일이니까. 저자가 또한 마트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입어보고 대보면서 엉망을 만들어 놓은 옷들을 개키는 장면 역시 내가 하루에 서너 번은 하는 일이다. 아침에 애들 등교하면 어질러진 옷 치우고 저녁에도 치우고 빨래하면 널고 개키면서 옷 정리하고. 그런 자질구레한 장면을 뭐 다시 활자화해서 재확인하는 기분이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가사노동은 평생노동의 종합선물세트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문장.

 

이번 프로젝트에서 내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세상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직업이라도 아무 기술도 필요 없는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261)

 

예전에 청년유니온 활동가 김민수 씨가 위클리수유너머에 글을 연재했는데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청년유니온에 있다 보면 인터뷰를 많이 하는데 최저임금 받으며 일한다고 하면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단다. ‘혹시 공부를 해서 (스펙을 쌓아서) 더 나은 직장을 가져보고 싶단 생각 안해요? 전문직이라던지좀 더 안정적인 직장 말이에요.’ 민수씨는 이에 발끈해서  패스트푸드점, 카페, 음식점 등의 아르바이트도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노동임을 구구절절 증명한다. 그리고는 따진다.

 

‘...꼴통들은 물론이거니와, 소위 배울 만큼 배우고 알만큼 안다는 이들조차 알바혹은 용돈벌이로 폄하하기 십상인 저들은 모두-전문직 종사자이다. ‘알바전문직의 간극은 종이 한 장이라는 수식어도 과분하다. 이 땅에서 입에 풀칠하기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대체 할 수 없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민수씨는 스물한 살 청년인데 책 한권의 분량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역시 일하는 사람은 지혜롭다. 길가에 꽈리고추 담아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할머니의 머리에서도 계속 사유작용은 일어난다. 단순하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인 것 같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온갖 것에 무방비 상태로 영향 받고 그래도 살아야하기에 그 자리에서 견디다보면 생각은 깊어지고 깨달음은 밀려오기 마련일 것이다. 삶에서 우러난 진리가 갖는 힘이겠지. 그러나 그런 진리의 담지자들은 자기 언어와 자기시간을 갖지 못해 책이 없고 책이 없으니 권력이 없다. 가난한 사람은 그대로이고 가난을 파헤친 사람은 부와 명예를 얻는다. <노동의 배신>은 세계 10여개국에 수출됐고 미국에서만 150만부 이상 팔리면서 빈곤문제를 조명하는 현대의 고전이 됐다고 책날개에 소개가 나온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말이다. 특히 빈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심각성은 더욱 짐작하기 어렵다. 점심을 과자나 핫도그 빵으로 때웠다가 근무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현기증이 나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을,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병가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들은 지속할 수 있는 삶, 심지어는 만성적인 결핍에 시달리는 삶의 일부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낮은 수준의 처벌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288)

 

고통이 고통인 이유는 끝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낮은 수준의 처벌이 지속되는 삶'으로 저자는 가난을 정의했다. 너무 가난해서 존엄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이 지구의 절반을 넘게 덮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 인류가 지속되어야하고 자본주의는 끄떡없는가. 이건희나 빌게이츠, 브라질 상류층 1%를 위해서인가. 나는 그것이 의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배를 곯는 덕에 당신이 더 싸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먹고살기에도 형편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면 그 여자는 당신을 위해 지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준 것이다...그들은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산다. 그들이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간다. 워킹푸어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모두를 위해 익명의 기증자, 이름 없는 기부자가 된다는 것이다.(296)

 

조지오웰도 <위건부두 가는 길>에서 같은 얘기를 역점을 두어 설파한다. 중산층의 속물근성과 계급적 이중성. 물론 비판의 칼날이 자기를 피해가지는 않는다. 까먹지 않기 위해 옮겨 적은 문장. '중산층 일원으로서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계급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그래서 자신의 일부를 포기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