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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삶이 힘들어도 '황제처럼'

오랜 가뭄끝에 단비가 내리던 6월의 마지막 날 <황제처럼>이 출간됐다. 이 책의 테마는 황제펭귄의 생애. 주제는 서로 곁에 되어 살자는 이야기다.  MBC남극의 눈물 제작팀의 일원으로 남극에서 300일 생활한 송인혁 카메라감독과 같이 작업했다. 나의 벗이자 기획자인 박희선과 셋이서 지난 3월부터 매주 혹은 격주로 회동을 가졌다. 홍대 카페에서 치킨집으로, 여의도 장미의 집에서 고수부지로. 감독님이 사진을 넘기면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열심히 듣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상상했다. 그러다 보면 황제펭귄의 사는 모습은, 우리들 산다는 것의 징하디 징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강물되어 흘러갔다. 만남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황제펭귄은 동창처럼 친근한 녀석이 되었고 정이 흠뻑 들어버렸다. 그렇게 장시간 웃고 울고 떠들고 느끼고 배우고 동정하고 흠모하던 온갖 황제펭귄 뒷담화, 그 진한 수다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티비에 방영된 영상을 그대로 이미지로 옮긴 단순한 포토에세이는 아니다. 아니고 싶어서, 아니려고 공을 들였다. 황제펭귄을 연구하다가 충동적으로 <노인과 바다>를 읽었고 집중적으로 동물에세이를 뒤적였다. 서정주, 정현종, 헤세의 문장도 별안간 떠올라 별사탕처럼 책 구석에다 숨겨놓았다. 송인혁의 기록과 기억, 나의 사유와 상상에다 사진 한장 문장 한 줄 차례로 교차시켰다. 책의 앞부분은 사실적인 황제펭귄 생애를 중심으로 담았고 어쩌면 본문은 에필로그-저자들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사실, 한 사람이 남극에서 신기한 동물을 보았다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닌 그 이후, 그로 인한 변화이다. 남극에서 황제펭귄을 만난 송인혁이란 사람은 어떻게 버텼고 어떻게 변화했을지. 그것을 집중 탐문하고 기록했다. 극한의 상황을 견디고 이질적 존재와 마주칠 때마다 존재가 변신-유지한다는 것. 삶의 감각이 바뀐다는 것. 그 삶의 개방성과 풍요로움 그리고 놀라운 생명력을 황제펭귄-송인혁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황제처럼>을 작업하는 동안 MBC 조합원은 황제처럼 고귀한 언론인의 삶을 위해 150일 파업을 이어갔다. 영하오육십도의 혹한과 존재가 얼어붙는 고통은 남극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삶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낳기 위해 오직 어깨 맞대고 참담한 상황을 이겨내는 엠비시 동지들, 재능노조 등 많은 투쟁현장의 동지들을 내내 떠올렸다. 원래 제목에 '삶이 힘들어도'를 넣느냐 마느냐로 갈등이 컸다. (궁상 맞아서 빼기로 했다만) 삶이 징그럽게 힘들어도 황제처럼 꼿꼿하게 존엄을 지키는 이들, 주어진 삶의 사명에 몰두하는 이들, 반복을 감내하는 이들, 언제나 내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는 그들로 인해 황제펭귄의 용감한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송인혁 감독님이 공수해온 남극사진으로 엮은 책이기에, 나는 부끄러워 그냥 숨어있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또 세상에 공저 아닌 책이 없는 거다. 원래 은유란 뜻은 존재의 확장이고 생산이다. 황제펭귄이 다른 황제펭귄의 몸에 기대어 추위를 견디듯이, 나의 삶에도 항상 타인의 지분과 체온이 깃들어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지.

 

<본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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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눈물이전에도 아마존의 눈물>을 촬영했고 <엄홍길의 약속> 다큐멘터리를 찍느라 에베레스트에도 올랐던 그다. 이젠 MBC 내에서도 오지촬영 전문가로 통한다. 아무리 극지탐험에 능하다 해도 고통스럽지 아니한 것은 아닐 터. 다만 하나의 사건을 겪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 하나를 접하게 되니, 그것은 죄다 모른 채로 살았으면 억울했을귀한 삶의 자리였다. 그 쾌락이 등 떠미는 것이다.

지구의 끝 남극에서 송인혁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밝고 쾌활한 사내가 아닌 그리움이 사무쳐 바늘 끝처럼 예민해진 한 남자. 카메라를 멈춰 서게 하는 추위도 문제지만 카메라를 잡지 않은 날에 그는 지독한 멜랑콜리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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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남극행은 일종의 목숨을 건 도약이다. 추상적인 마음의 준비보다 구체적으로다가 서랍의 정리가 필요하지 않았나.

 

당연히 했다. 통장도 정리하고우리 애들이 아빠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 하는 흔적은 지우고. 서류 분쇄기로 카드 영수증 같은 버릴 것들 버리고 책상 서랍에 정리해서 넣어놓고 사무실 행정 담당하는 친구한테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족에게 인계해주라고 말했다. 에베레스트 갈 때랑 남극 갈 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다. 호주 기지에서는 유서를 쓰라고 한다. 근데 재수 없어서 안 썼다. 정리는 하지만 안 돌아온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한다. 나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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