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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육아 말년의 소회

강의 시작 직전,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둘째 담임샘’이라고 뜬 액정을 보니 가슴이 덜컹. 사고가 났나 싶어 전화를 받았다. 담임은 아이의 급식비가 넉 달 치 밀렸으니 입금해달라고 한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학교 연계 계좌에 돈을 넣어둬야 하는데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납금을 재차 확인하고는 담임샘과의 첫 통화를 마쳤다.

다행히 열명 남짓한 소규모 강의였다. 양해를 구하고 바로 계좌이체 후 담임에게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시계를 보니 7분 경과, 학부형에서 강사 모드로 돌아와 수업을 끝냈다. 나야 ‘돈’보다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통장에 30만원이 없었으면 얼마나 난처했을까. 불쑥 지난 24년 육아의 무게가 밀려온 나는 결국 아이한테 한소리 했다. 왜 미리 말을 안 해서 엄마 일하는데 전화를 받게 했느냐고. 아이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엄마가 만날 바쁘니까 말할 타이밍을 계속 놓쳤지.”

지난해 여름 일인데 가끔 생각난다. 부,모,라고 말하면서 이런 잡다한 일엔 왜 엄마가 먼저인가. 두 아이 키우며 맞벌이하는 동안 유치원, 학교, 학원에서 오는 연락은 전부 내 차지였다. 업무 중 “○○ 어머님이시죠” 하는 연락이 오고 학부형으로 호출될 때마다 일의 연속성이 깨지고 모자란 엄마라는 자책감에 빠졌지만 당연하게 여겼다. 난 엄마니까.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다. 한번은 유명 여자배우를 인터뷰했을 때 대화 도중 그녀가 ‘아이 담임’이라며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나비의 날개처럼 우아하게 펼쳐졌던 어깨가 1초 만에 굽어지더니 공손한 학부형으로 연기하듯 변신했다.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신경 쓸 일이 많다며 그녀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사는 모습이라 하기엔 씁쓸한 것이, 그동안 인터뷰나 강의할 때 자녀 학교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남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켄 로치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나는 택배노동자 리키보다 그의 아내에게 신경이 쏠렸다. 방문 간병인으로 일하는 그녀는 이동하는 길에 핸드폰을 붙잡고 딸에게 집에 가면 파스타를 데워 먹으라고 말한다. 무단결석한 아들의 학교에서 걸려오는 경고 전화를 받기도 한다. 집에선 폭발하는 남편과 맞짱 뜨는 아들 사이에서 눈물로 호소하며 중재를 맡는다. 출근이 없어서 퇴근도 없는 돌봄노동, 폭력의 불길을 잡아야 하는 감정노동은 그녀의 몫이다. 막판에 학교의 부름을 받았을 땐 둘 다 못 간다고 다투다가 결국 아빠인 리키가 간다. 영화는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보들레르)처럼 살아가는 불안정노동자 부모의 일상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코로나19 국면을 사는 요즘, 나는 고3 학부형으로서 ‘끝나지 않은 방학’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 중이다. 지자체의 재난문자로 아침을 열면 아이가 다니는 학원 두군데에서 오는 일정 안내, 연기 안내, 등하원 알림, 그리고 ‘코로나 이기는 면역력 강화 식단’을 알리는 마트 서너곳의 마케팅 문자까지, 핸드폰은 온종일 엄마로서 내 임무를 상기시킨다.

살림에는 ‘빨래는 네가 청소는 내가’로 나눌 수 없는 모호한 영역이 있듯이 양육도 그렇다. ‘고작’ 전화 한통, 문자 하나같이 말하기도 애매하고 사소하고 치사해서 나눠 질 수 없는 짐이 존재한다.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 엄마 노릇이 막판까지 왜 이리 고된지 이유를 몰랐는데, 주 양육자의 초기값이 엄마로 자동설정된 가부장제 시스템에서는 엄마라는 것 자체가 하는 일임을 ‘육아 말년’인 지금에야 깨닫는다.

* 한겨레 삶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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