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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아침 꽃 저녁에 줍다'

감색 재킷을 입은 그는 첫날부터 눈에 띄었다. 글쓰기 수업에는 원래 남성이 드문데 그간 개량한복 입은 사람은 있었어도 각 잡힌 양복 차림은 처음이었다. 직업은 회사원. 기성복에 길들여진 몸처럼 생각도 표준화됐을 수 있기에 나는 마음이 쓰였다. 그가 과제를 발표했다.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근무가 태만한 동료와 일하는 고충에 관한 글인데 몸이 불편한 동료라서 더 선의를 갖고 대했지만 역시 장애인은 힘들더라는 결론으로 흘렀다.

몇몇이 반론을 폈다. “이런 업무 구멍은 비장애인에게도 흔한데요? 일 못하고 회식 다음 날 늦는 상사는 어디나 있지만 그렇다고 ‘이래서 비장애인은 안 된다’고 하진 않아요.” 또 다른 이는 오빠가 시각 장애가 있는데 특진했다며 장애인을 무능력한 존재로 일반화하기엔 글에 논거가 약하다고 했다.

글쓰기는 문장 쓰기가 아니라 관점 만들기를 배우는 일이다. 비문 없이 정확한 문장들, 문학적인 수사를 곁들여 차분하게 써 내려간 서사의 흐름이 아무리 돋보여도 혐오와 차별 표현이 있으면 공적인 글로서 가치를 잃는다. 난 해야 할 말을 해야 했다. 교재로 읽은 책에도 나왔듯이 장애인, 여성, 이주민 같은 경우 개인이 잘못해도 집단이 매도당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다. 글 쓸 땐 혹시 편견과 통념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책 내용을 내 일상으로 가져와 검토해야 한다고.

가끔 겪는 일이다. 어떤 이는 세월호 사건을 내 자식의 안위를 챙기는 방편으로 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실없이 여성 동료의 외모를 평하고 성희롱 발언을 일삼고도 칭찬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다. 무심결에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나는 언행에 대해 정확해서 신랄하게 느껴지는 비판을 받은 이들은 거의 이후 수업에 불참했다.

이 예견된 실패가 내 오랜 근심이자 숙제다. 저마다 생각과 인식의 격차 속에서 어떻게 어울려 공부하고 살아갈까. 자식을 키울 때도 느끼지만 옳은 말은 구체적 상황 앞에서 힘을 잃는다. 변화는커녕 생각의 교류 기회마저 단절시키기도 한다. ‘이게 옳아. 그건 혐오야’라는 말은 발언자에게는 정의감을 주지만 상대에겐 무안함을 한 바가지 안겼다. 당황해서 입 다물고 침묵하니 대화가 단절되는 식이다.

내 고민을 듣고 누가 물었다. “샘, 생각이 다른데 피곤하게 꼭 같이 배워야 돼요?” 맘 편히 말 통하는 사람끼리 공부하잔다. 그 논리대로 난 질문했다. 비슷한 정보량과 익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끼리 왜 굳이 모여서 공부해야 하느냐고. 그건 독백이지 토론이 아니다. 공부를 해도 심기에 거슬리는 게 없고 이전과 달라진 게 없으면 서로에게 좋은 공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사유는 마찰에서 싹튼다.

양복 입은 그를 비롯해 떠나간 이들이 가끔 생각난다. 쓸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 역량 밖이라며 고개 돌렸다. 그런데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이 변화의 시도를 포기하는 게으름에 대한 자기정당화는 아닐까.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인데, 배우려고 온 사람이 배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건 당사자의 용기 부족도 있지만 공동체의 무능이기도 하다.

사회 안팎으로 구성원의 욕망과 존재가 다양해짐을 느낀다. 서로의 삶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혐오 문제는 상수로 존재할 것 같다. 묘안은 안 떠오른다. 그저 ‘아침 꽃 저녁에 줍는’ 마음으로 즉각 반응하기보다 한 호흡 고르고 신중할밖에. 무지가 배움을 중단하는 계기가 아니라 배움을 이어나갈 동력이 되려면 지혜를 모을 시간이 필요하다. 다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중이라서 우리가 모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한다.

 

*한겨레 삶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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