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불린 내 이름

[은유칼럼]

“자기가 돈 좀 걷어. 선생님 드리게.” 스승의 날 무렵, 수영장 같은 반 ‘언니’가 명했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내가 다니는 월·수·금 오전 9시 반은 50~60대 여성 서넛, 애가 어려서 수업에 잘 빠지는 젊은 엄마, 20대 젊은 남성으로 구성됐다. 결석 없는 제일 ‘어린’ 회원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지난번 설 명절에도 내가 떡값을 걷었다.

고령화 시대라서 농촌에 가면 60대가 ‘청년부장’이고 막내라서 ‘막걸리 셔틀’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 된 심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얼굴 보는 사람마다 언제까지 돈을 가져오라고 당부하고, 탈의실에서 머리 말리는 사람 붙들고 돈을 받아내고, 현금이 없다는 사람에게 계좌번호를 찍어주어 입금을 받고, 몽땅 현금으로 챙겨서 돈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서 강사에게 금일봉을 전달한 바 있다. 그 짓을 또 하라니. 평생 가계부 한 줄 안 쓰고 촌지 한번 안 주었으며 돈 계산에 서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수영장에서 난 다른 세계, 다른 몸을 산다. 육지의 상식과 언어가 수중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왜 꼭 나이 적은 사람이 해야 하냐며 연령주의를 비판할 수도, 남자 회원이 걷으라며 성평등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번에도 추석이랑 설에만 선물을 드리면 안 되냐고 말했다가 “노래교실에서도 스승의 날엔 안 하는 경우가 없다”라는 반박에 입을 닫아야 했다. 수영 강습 50분, 샤워 20분인데 맨몸으로 논쟁하기도 멋쩍거니와 그들만의 관습을 부정할 용기도 없다.

특히 난 ‘수영 약자’다. 시력이 나빠 건너편 강사도 못 알아본다. 샤워장에서 먼저 인사하는 다른 회원을 지나쳐 오해를 사기도 했다. 운동신경 둔하고 폐활량 낮고 겁은 많다. 초급반에서 가장 늦게 자력으로 물에 떴다. 배영, 평영, 접영 등 새로운 영법 자세를 똑같이 배워도 유독 어설프고 우스꽝스럽다. 그럭저럭 써온 몸뚱이가 무력해지는 상황, 남겨지는 사람이자 뒤처지는 몸으로 존재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어영부영 10개월이 지났고 수영장 생활에 적응 중이다. 떡값을 일인당 2만원 걷는데 자신은 1만원만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샤워기 하나로 신경전을 벌이고, 레벨과 속도로 자존감을 겨루는 ‘언니’들은, 내게 “팔꿈치 펴라”며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하는 전문가이자 ‘락스 물’을 잔뜩 먹고 꺽꺽거리는 걸 보고 “오늘도 보약 먹었네~”라며 용기와 웃음을 주는 동료들이기도 하다.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60쪽)”을 목도한다. 

수영을 배우며 “이질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숙시켜나갈 기회(166쪽)”를 가진 것 같다. 그간 내가 얼마나 동질 집단에서 안전하게, 혹은 오만하게 살았는지 실감했으니까.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 또한 ‘몸에 힘을 빼라’ 같은 수영 이론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따르는 것의 괴리를 체감하고 나니,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말하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같은 원칙들이 학인들에겐 얼마나 막막하게 느껴질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230쪽)”는 말을 곱씹어본다.

며칠 전에는 수영장에서 오가며 눈인사만 나눈 한 회원이 말을 걸었다. “언닌 이름이 뭐예요?” 순간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지영이요. 지영….”

내 본명인데 한동안 불러주는 사람이 없던 이름이라 발음조차 낯설었다. 비대해진 ‘은유’ 자아를 비활성화하고, ‘지영’ 자아로 사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시사인 은유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