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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읽을 만한 책 좀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시를 읽고 싶다, 니체를 읽겠다, 독서모임 하겠다며 강연장에서 혹은 이메일로 생면부지의 사람이 물어올 땐 난처하다. 나는 책 소개가 어렵고 두렵다. 어떤 책이 좋았다면 당시 나의 욕망과 필요에 적중했기 때문인데 그 책이 남에게도 만족스러울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그냥 지금 읽는 책을 말하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한테 끌리는 책을 몸소 찾아보는 시도가 독서 행위의 시작이라고 얘기한다. 

출판 관계자들은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게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것도 크겠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재밋거리를 누릴 기회가 많은 데 비해 책의 재미에 빠질 기회는 적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추천도서를 선정하는 일방적인 방식도 사람들이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 같다.

누가 추천하는가. 책 단체나 관계자, 학자나 지식인, 행정 관료, 심지어 자본의 증식을 연구하는 대기업 경제연구소가 나선다. 대 학생이 읽어야 할 권장도서, 학년별 도서 목록, CEO 여름휴가 도서 목록, 올해의 책을 발표한다. 추천자의 삶의 조건과 목적은 특수하다. 평생 활자와 친했고, 책 보는 게 직업이거나 일과 중 독서 시간 확보가 가능한, 읽는 훈련이 된 일부 계층의 관점이 반영된 목록이다. 그런 책들이, 책을 거의 안 봤거나 볼 시간이 없고 고된 노동과 학습에 지친 이들의 일상에 지적·정서적 쾌락을 주는 ‘좋은 책’으로 스밀 수 있을까. 추천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지인이 교양 필독서에 단골로 오르는 장 그르니에의 <섬> 독서 실패기를 말한 적 있다. 책이 몸에 밴 애서가였다. 여기저기서 좋다는데 자기만 이해 못하는가 싶어서 위축됐단다. 나도 사놓고 안 읽혀서 못 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대학생 추천도서에 꼽히는 책이다. 상징과 비유로 된 문학서이자 철학서로 난도가 높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역자 해설에도 나온다. 지금은 나의 인생 책이지만 만약 스무 살에 봤다면 조용히 덮었을지도 모른다. 책은 따분하다는 편견을 심화하고 독서 활동을 중단시키면 ‘고전’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고유한 책 취향이 생기기 어려운 이유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이란 우리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이며, 악은 우리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억제시키는 것이다(253쪽).”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절대명령처럼 주어지는 도덕(moral)을 비판하며 자기 삶의 조건에서 선악을 재정의하고 좋은 마주침을 조직하라고 권한다. 스피노자의 말대로라면, 좋은 책은 읽는 기쁨을 가져오는 책이고, 나쁜 책은 책에 대한 동경을 방해하는 책이다. 

어린이책은 어른들이 고르기 때문에 추천도서 선정 시 전문가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한다. 지난 4월 청소년 참정권 집회에서 만난 한 어린이책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성의 권위로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한, 아이들에게 고유한 책 취향이 생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좋은 책’이라는 모호한 말 대신 내가 혹은 네가, 선생님이 ‘좋아하는 책’으로 표현이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는 거다. 십분 동의한다. 경영자가 추천한 책을 노동자가 읽고, 교사가 선택한 책을 학생이 보고, 평론가가 권하는 책을 책 입문자가 산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누가 내게 ‘좋은 책’을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겠지만 ‘좋아하는 책’을 물어오면 기꺼이 말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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