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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평범이라는 착각, 정상이라는 환영

초여름 볕이 좋아 이불을 빨아 널다가, 베란다에 빨래가 널려 있으면 저 집은 평범한 일상이 돌아가는구나 알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빨래는 평화의 깃발인가. 두 아이를 면 기저귀 채워서 길렀다. 전업주부라 시간이 많았다. 하루치 똥오줌을 받아내고 세탁기를 돌리고 하얗고 네모난 기저귀를 널고 마르면 걷어서 개켰다. 일상 의례처럼 날마다 빨래를 하던 그 시기가, 그러고 보니 내 생애 가장 평범한 날들이었다. 평범의 뜻이 무변고·무고통·무탈함이라면.

얼마 전 여성 쉼터에 사는 한 친구가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는데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저 거실 안에는 지금쯤 식구들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겠지 싶고 자기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거다.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 집에 막상 가보면 애들은 학원에 갔거나 방에서 핸드폰 하고 있고 아빠는 없거나 엄마는 일터에서 돌아와서 잔뜩 쌓인 설거지통을 보고 한숨 쉬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직간접 경험에 근거해 말했고, 우린 같이 웃었다. 

3년 전 친족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담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이매진, 2012)의 저자 은수연씨를 만났을 때다. 그는 가해자로부터 단절된 이후 일상의 변화를 말했다. 요즘 눈에 독기가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시끄러운 카페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세월호 사건에 남들처럼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평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힘든 과거가 불쑥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더 이상 일상이 엉망이 되지 않는 상태를 평범함으로 규정했다.

평범한 삶을 누구는 집 안에서 찾고 누구는 집 밖에서 찾는다. 무엇이 평범함이냐, 그 뜻과 의미와 기준은 각자 다르다. 평범함이 행복이고 평범하지 않음이 불행이 아니라, 평범의 기준이 나에게 있으면 행복하고 남에게 있으면 불행한 거 같다. 평범함의 의미를 자기 삶의 맥락에서 똑 부러지게 규정하는 은수연씨에게서 불행의 그림자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나의 평범했던 날들, 낮에는 흰 빨래가 걸리고 밤에는 거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아파트에서 퍽 무탈한 일상을 이어갔으나 행복이 막 샘솟지도 않았다. 그 안전하고 예사로운 4인 가족 틀을 벗어나 캄캄하고 어지러운 외부 세계에 맞닥뜨렸을 때, 글쓰기로 하루하루 정신을 깨끗하게 빨아 널고 낯선 이웃을 만나고 삶의 가치라는 내면의 등을 밝힐 때 외려 충만했다.

그날 쉼터에 사는 친구와도 얘기했다. 혈연끼리 마주하고 과일 먹고 텔레비전 보는 것만큼 같이 사는 생활인들과 빵을 먹으면서 평범함에 관해 대화하는 것도 좋은 일상 같다고. 안전한 거처로서 주거 공간은 삶의 기본 조건이기에 필요하지만 ‘정상 가족’이라는 환영이 만든 집은 깨뜨려야 할 무엇이라고. 그건 집이 노동과 위험의 공간인 약자들을 배제하고 집을 휴식과 평화의 공간으로 점유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니 말이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는 평범하지 않은 여성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까지 걸어온 여정을 담은 에세이다. 선천적 장애로 멋대로 뒤틀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어머니는 손님이 오시면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어 보이지 않게 했다며 “내가 느끼는 수치심은 어머니에게 배운 것(184쪽)”이라고 말한다. “자기혐오, 숨기는 것에서 오는 고통, 침묵의 답답함(359쪽)”에 갇혀 살다가 집을 나오고 세상과 부딪치며 “정상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을 버릴 수 있었다며 더 일찍 버리지 못했음을 개탄한다.

저자는 이렇게 매듭짓는다. “정상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기를 쓰고 추구하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환영 같은 거야(369쪽).” 베란다 빨래와 불빛에는 멀쩡해 보이는 남의 삶이 있고, 자기 삶은 수치와 상처와 결핍으로 얼룩진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놀라운 기적’에 잠복해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