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오르는말들

(110)
꽃수레의 존재미학 ‘방학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일년에 두 번 노랫말을 바꿔 부르고 싶다. 엄마의 속도 모르고 꽃수레는 그나마 다니던 학교마저 안 가도 된다며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난 두려웠다. 말하기 싫어도 말해야 하고 배고프지 않아도 밥해야 하고 혼자 있고 싶어도 둘이 있게 되는 방학이 내겐 너무 잔인하다. 여튼, 방학 다음 날 꽃수레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계획표를 그려서는 24시간을 분배하더니 여름방학 특집 ‘강령’ 같은 것도 별도로 작성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놀기였다. 신나게 놀기, 많이 놀기, 행복하게 놀기. -.-;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는 외롭다. 특히 방학. 학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를 도통 만날 수 없다. 혼자 놀기엔 여름 해가 길다. 꽃수레는 아침에 일어나 그림 한판 그..
보편적인 노래 보편적인 하루 # 오전 10시.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이날은 병역거부자 현민의 가석방데이. 우산 받쳐들고 영등포교도소로 향했다. 오전 10시에 맞춰 겨우겨우 도착.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고 어색한 표정의 출소자들이 경계를 넘는 극적인 상봉을 기대했으나 불발이다. 예정보다 일찍 나온 민이는 벌써 비를 피해 건물로 들어가 엄마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눈부실만큼 하얀 셔츠에 쥐색 바지, 짧게 깎은 머리가 어쩐지 수도승 같기도 했다. 그동안 위클리수유너머 '영장찢고 하이킥'에 보내온 글에서는 이미 깨달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령 '유치함에서 두어 계단 오르면 잔인함에 도달한다' 같은 구절. 바늘귀같은 마음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피폐함을 토로하는 대목이었을 거다. 폭발할 듯한 침묵의 요동. 몸으..
커피와 상처 모처럼 믹스커피가 먹고 싶어 커피물을 끓였다. 2분여 흘렀을까. 보글보글 물이 익어가는 소리 요란했다. 무선주전자 뒤편의 믹스봉지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벌레를 포획하는 새처럼 날렵하게 믹스스틱 하나 빼오려는 찰나, 눈보라처럼 회오리치던 뽀얀 김이 손목을 감쌌다. 1초 정도. 아아아. 칼바람 속을 지날 때 "추워 추워" 란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처럼. 아파. 아파. 말이 샜다. 손목을 심장 앞으로 얼른 뺏어왔을 때는 이미 피부가 벌겋게 익은 이후다. 찬물로 씻고 얼음찜질을 했다. 손목에 가스렌지가 내장된 기분. 시간이 흐를수록 살이 가열됐다. 후끈후끈. 약국에 가서 화상 연고를 사서 바르고 진정되길 기다렸다. 웬걸. 반나절이 지나자 상처부위가 검지손가락만한 투명에벌레 모양으로 부풀어 올랐다. 달걀이 비..
조르주 프레트르 - 헝가리무곡 1번 나이들수록 멋있는 직업의 최고봉은 지휘자다. 오선지 같은 주름 사이로 눈빛이 음표처럼 춤춘다. 지휘자를 보고 있노라면 뭔가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아, 저것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나오는 그 우주만물의 신묘한 진리가 깃든 손이 아닌가. 감탄한다. 지휘자라고는 카라얀 밖에 모르다가 '조르주프레트르' 이 사람에게 반했다. 콘트라베이스 지적질할 때는 저 청년의 품에 안긴 콘트라베이스가 되고 싶다. -.-;;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동영상 찾아서 음악듣는 재미가 크다. 보물찾기다. 내가 필꽂히는 음악인은 대개가 중장년층. 흑백화면에 출연하는 원로음악인이다. 며칠 전 노트북 앞에 바짝 붙어서 군침 흘리는 에미의 등뒤로 아들이 지나간다. "아들아, 부디 음악하는 늙은이로 늙어라."..
여자의 한살이 주말에 옷정리를 했다. 집이 좁은 관계로 일년에 두번 치러야하는 일. 서랍장에 있던 동절기 옷을 꺼내서 수납합에 넣어 장롱 위에 올려놓았다. 나풀나풀한 봄옷과 컬러풀한 여름옷이 대방출됐다. 옷가지를 챙기면서 '입지도 않을 쓸데 없는 옷, 앞으로도 입을 일 없는 옷들'에 눈길이 갔다. 확 버리고 싶은데 본전생각 땜에 이고지고 산다. 3년째 보관중인 새원피스를 입어보았다. 흐린 분홍과 연보랏빛이 감도는 미니멀하고 여성스런 스타일인데 몇번 입고 현관을 나가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어색하고 오글거려서 집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수가 없었다. 왜 샀느냐하면 '변신욕망' 때문인데 그 때 뿐, 문턱을 넘지 못한다. 한번 입어나 보자 싶어서 원피스를 무슨 푸대자루마냥 뒤집어 쓰고 거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그런 나를..
리스트 라캄파넬라 - 윤디 리 Liszt La Campanella - by Yundi Li 피아노는 신기하다. 깃털같은 소리도 나고 폭포같은 소리도 난다. 정확히 짚어내는 손끝. 바늘끝처럼 날카롭고 수려한 선율이 가슴에 탁탁 꽂힌다. 리스트의 라캄파넬라는 손이 세 개 있어야 칠 수 있는 곡이라는데 진짜 어려워 보인다. 뛰어난 기량으로 말끔하게 자기만의 연주를 펼치는 중국인 피아니스트, 윤디 리. 열여덟살인 2000년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최연소 입상했다고. 젊은연주자답게 힘있다. 기백과 낭만의 공존. 무한반복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달랜다. 음악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만 음악이다.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음악은 많다. '함정을 파면 그것을 판 장본인이 빠지는 장소. 그대가 달라붙어서 몸부림치고 그대도 역시 달라붙은 채 한 발자국도 나아..
아들 따라 남고에 가다 남고를 처음 가봤다. 생후 40년 만에. 운동장에는 푸르딩딩한 수박색 추리닝을 입은 남학생들이 공을 차고 있다. 인조잔디가 깔리지 않은 흙바닥에 구름먼지가 인다. 전봇대만한 아이들의 그림자가 뒤엉킨다. 완전 어른이구나. 남고가 꼭 ‘군대’같다고 생각한다.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강당으로 간다. 넓은 공간이 꽉 찼다. 평일 오후인데 양복차림 남자가 많다. ‘요즘은 아빠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다더니 이런 자리에도 온단 말인가’ 새삼스럽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복잡한 도표와 통계치를 내민 입시현황을 보고한다. 서연고 정원이 몇 명 인서울 이과 문과 정원이 각각 몇 명. 그래서 우리학교 전교에서 몇 명이 서울소재 대학을 진학한다는 말씀이다. “이과는 2.5등급까지 경기권 대학에 들어갑니다. 문과보단 훨씬 ..
깨어나기 컨베이어벨트 돌아가듯 날마다 원고 찍어내던 때가 있었다. 재봉틀 드르륵 박고 (문장을 쓰고) 단추 달고 (제목 달고) 끝도 없이 나오는 실밥 뜯고 (교정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저물었다. 이젠 그 짓을 못하게 됐다. 몸이 녹슬었다. 아주 다행이다. 쉽게 글이 써진다는 사실이 반은 대견하고 반은 수치였다. 익숙한 생각, 진부한 표현들을 국수 가락처럼 쭉쭉 뽑아낸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노동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고 아이들 입에 밥을 넣어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래서 아무 것 아닌 정지의 느낌. 인생은 너무 길다는 한탄이 나를 지배했다.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닌 불면의 감각으로 일 년 쯤 산 것 같다. 나 이제 사보에 글 쓰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