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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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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처럼 '좋은 인연' 만나려면 # 엥겔스가 엥겔스를 만든다 맑스의 여자관계는 어땠을까. 맑스가 무슨 면벽수행 하는 수도승도 아니고 학자에게 지고지순형 러브스토리를 기대할 이유는 없다. 그저 궁금증의 발로다. 알아봤더니 부인 외에 하녀에게 나은 자식이 한 명 있었다. 맑스의 공식인정은 아니고 여러 정황에 따른 추측이다. 맑스 혼외자식설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맑스가 죽은 후 그 아이를 엥겔스가 돌봐주었기 때문이란다. 이런 말들이 났으리라. “엥겔스가 돌봐주는 걸 보니 맑스의 자식이 틀림없군!”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의 깊은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두 사람은 40년 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공유하며 우정의 궁극을 실현했다. 방직공장 사장 아들로 태어나 부유했던 엥겔스는 늘 빚에 허덕이는 맑스에게 매달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스폰서 역할을..
자유기고가와 글쓰기 자유기고가는 내게 산타 양말이었다. 뭐든지 다 들어가는 신축성 좋은 선물보따리처럼 일곱 빛깔 각양각색의 기쁨과 행복의 목록이 다 담긴 직업의 세계였다. 자유기고가의 활동영역은 다양하다. CEO, 생활수급자, 연예인, 최고액연봉자 샐러리맨 등등 각계각층의 인터뷰부터 여행기, 맛 집 탐험, 금융상품 소개, 각종 동호회 탐방, 현장 취재, 도서비평, 문화칼럼, 기업 브로셔 카피 등등 전방위적 글쓰기가 행해졌다. 신문으로 치자면 1면부터 16면 광고까지 아우르는 셈이다. 만으로 4년, 자유기고가로 일하면서 어설프게나마 신맛부터 쓴맛까지 감각적 글쓰기를 익혔다. 몸도 바빴다. 저 아래 제주도부터 삼팔선 넘기 직전까지 반도의 땅을 훑고 다녔으며, 서울시내 지하철의 거미줄 같은 노선의 각 역마다 발자국을 남겼다. 4..
꽃수레의 명언노트 - 두번째 이야기 # 꽃수레가 요란하다 ‘꽃수레’는 딸아이 애칭이다. 일종의 자화자찬인데, 자기를 그렇게 부른다. 원래는 꽃처럼 예쁘고 방긋방긋 웃는단 뜻의 ‘꽃방스’였는데 어감이 뚱뚱해 보인다;;며 가냘픈 ‘꽃잎이’로 바꾸겠다더니만 또 어느 순간부터 꽃잎이 수북한 ‘꽃수레’가 좋겠단다. 그런데 꽃수레에 대한 과도한 애착과 반복사용이 문제다. 삼복더위에 매미 우는 소리가 따로 없다. 원래 목소리도 또랑또랑한데다가 하루 종일 말끝마다 '꽃수레' 타령을 하는 통에 밤이 되면 귀가 웽웽 어지럽다. 이런 식이다. 엄마 밥 줘 해도 될 걸 “엄마, 꽃수레 밥 줘~” 나 숙제할게 가 아니라 “꽃수레 지금부터 숙제할게~” 외출 중에 전화해서는 “엄마, 꽃수레야. 꽃수레 학교에서 방금 왔어, 엄마 없어서 꽃수레 쓸쓸해. 근데 꽃수레 오..
사람이 변한다는 것 저번에 선생님 만났을 때 선생님이 쓴 소설 세 편을 전달받았다. 집에 와서 꼼꼼히 읽어보고는 감상문을 써서 메일로 보냈다. 객관적 독자의 입장이 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비평전문가도 아니지만, 글과 선생님을 사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고 느낀 그대로를 말씀드렸다. 이런 내용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정갈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는 질투심을 유발했습니다. 여기에 깊은 성찰 끝에 삶 속에 터진 명문장이 있었으면 글의 품격이 더 살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A작품은 구심력이 뛰어나 잘 읽히는데 주제의식이 미약합니다. B작품은 20년 전이 아닌 지금 나온 이유가 설득력이 없는데다가 남주인공 캐릭터가 밋밋해서 러브스토리에 긴장이 안 생깁니다. C작품은 가장 완성도가 높습니다. 가슴 먹먹하면서도 덤덤히 읽히는..
대화 # 산채정식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살 테니까 맛있는 거 골라 봐. 아네요. 선생님. 연락 못 드린 죄도 있고.. 제자가 모셔야 도리죠.. 여기 음식 잘 나온다.. 다 내 취향이네.. 그쳐? 절음식처럼 정갈하고 맛나더라고요. 왠지 선생님이 좋아하실 거 같았어요. ^^ 산채 한정식을 한 상 앞에 두고 반찬만큼이나 다양한 오방색 빛깔의 정담이 오갔다. 4년 6개월 동안의 해직교사 생활 이야기. 공부에 미련을 못 버린 사모님이 유학 간 이야기, 혼자서 아이 데리고 전교조 사무실 다니면서 육아한 이야기. 책과 대화로 키운 아이가 사교육 없이 외고에 가고 전액 장학금 받고 미국으로 유학 간 이야기. 아흔 넘은 노부와 함께 사는 이야기. 그리고 나의 남편과 아이들 사는이야기 약간까지. 드라마에서 내레이션으로 사건을..
아들과 딸 며칠 전 아들 학교에 갔다. 아들 학교가 내년에 실시될 교원평가제 시범학교로 선정되어 공개수업을 실시했다. 아들 반은 체육시간이었다. 전교생이 이천 명인데 운동장이 매우 협소하다. 100m달리기를 못해서 50m달리기로 시험을 봤을 정도다. 그 좁아터진 곳에서 다섯 학급이 체육을 하러 나왔다. 한 반에 40명 씩 200명에 학부모까지 모이니까 이건 완전히 추석 연휴 전날 서울역 대합실보다 더 바글바글 복잡했다. 체육수업이 과연 가능할까 염려스러웠는데 세상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 학급별로 달리기, 줄넘기, 농구 등등을 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롭기까지 했다. ‘다 살게 마련이구나...’ 감탄을 하면서 지켜보는데 어떤 엄마가 말을 건다. “누구 엄마세요? 애가 학교생활 재미있다고 하죠? 담..
여덟살인생 - 딸의 명언노트 “엄마 나도 이제 슬슬 명언노트를 써야겠어!” 어느 날 딸이 인형놀이를 하다가 툭 던지듯 말한다. 느닷없이 웬 명언노트인가 싶어 의아했는데 곧 상황을 파악했다. 한달 전인가 내가 아들에게 '너도 이제부터 책 읽다가 좋은 구절을 모아 명언노트를 써보라'고 말한 걸 옆에서 귀담아 두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딸은 둘째아이 특유의 '시샘과 모방'이 생존의 동력이다. 내가 아들한테 '학교에서 오면 수저통 좀 꺼내놓으라'고 말하면 딸은 그 다음날부터 현관에서 신발 벗자마자 수저통부터 싱크대에 올려놓는 식이다. 다 좋다. 명언노트 결심 또한 바람직하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 때는 주로 인형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놀이터에 나간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야 책에 손이 가..
점쟁이의 말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맴도는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말끔한 잊혀짐은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9월의 드높은 하늘을 보니 점쟁이의 말이 떠오른다. 역술인 혹은 무속인.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그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