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해 성탄절이 ‘詩’와 ‘음악’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 생은 복되다, 주머니에 손 넣고 만지작거릴 추억이 있으니까. 2011년 12월 24일 자정을 보내며 든 생각입니다. 예고했던 대로 ‘말들의 풍경’ 성탄특집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뭉근한 촛불처럼 한들한들, 흥겨운 캐롤처럼 왁작지껄, 시와 음악이 난무하고 말과 웃음이 교통하는 시간이었죠. 고종석이 ‘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했는데 살짝 정정하고 싶군요. 시는 세상에서 가장 센티멘털한 놀이라고요. 이날 세미나의 공식명칭은 '말들의 풍경 : 시적인 것의 추구’에요. 시를 읽은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 널린 시적인 울림을 주는 노랫말이나 글을 가져오기로 했지요. 약간의 음식도요. 아래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 음향담당; 몽월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음악 제공)
- 사진담당; 한준
- 기타연주; 안단테
- 스페셜게스트; 송성복 (명운의 반려자)
- 파티메뉴; 케이크, 칠레산 와인2병, 맥주와 음료, 절편, 영양떡, 고급쿠키, 제주감귤, 양념치킨, 고구마 구이 등등.
- 시 낭독; 혜진, 명운, 화이트, 은미, 한준, 안단테, 은유, 몽월, 은재, 소영, 현민, 단단, 성복
세미나실 불을 끄고 고구마케이크에 촛불을 켰습니다. 아, 오순도순 촛불아래 펼쳐진 풍경은 성냥팔이 소녀가 촛불에서 보았던 중산층 부르주아 집안의 환영幻影, 그것이었죠. 안온하고 풍요로운 성찬. 날이 날이니만큼 캐롤송 한 곡 부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만만한 징글벨이 선곡되었고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를 합창했습니다. 박수쳐가며 불렀는데 ‘징글벨’이란 단어는 끝내 한마디도 안 나오더군요. 서로 어리둥절 묻습니다. “어멋, 캐롤이 아니었나봐?”
# 혜진; <butterfly>
영화 국가대표ost <butterfly>를 골라온 그녀. 평소 심리상담가답게 시를 깊고 섬세하게 읽어주던 혜진이 다소 오글거리고 희망주입적인 노래가사를 골라왔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정이 생기면 주고 싶잖아요”로 운을 뗀 혜진. 시세미나에 정이 들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얘기하고 싶었다며 ‘꺾여버린 꽃처럼 아팠’던 생의 위기국면을 터놓았어요. “전시적인 삶”을 접고자 마음먹고 좋은 직장도 그만두었답니다. 그러자 존재증명이 막막해지고 세상이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던 어둡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 때 힘을 주었던 노래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세상은 너를 몰라
후회 속에 감춰진 너를 못 봐
나는 알아 내겐 보여
그토록 찬란한 너의 날개’
# 명운;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를 일등으로 신청한 덕분에 안단테가 기타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약간의 편곡이 된 담백한 외로움을 감상. 남녀 누가 불러도 언제 들어도 가슴에 가는 비가 내리는 곡이죠. 명운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생각난 노래”라고 신청의 변을 밝혔습니다. 남편과 동반한 그녀. 언젠가, 결혼이 외로움을 박멸해주는 건 아니라며 “(외로움이) 최소한 둘!”이란 오규원의 시구를 멋지게 해석했었죠. 명운은 외로움 전문가.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 화이트: <별>
이소라 6집 ‘눈썹 달’, 조동진 베스트 앨범 등 손때 묻은 CD를 가져와서 시적인 것에 대한 무한애정을 표현하셨습니다. 화이트는 “이소라가 너무 좋지만” 듣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 슬픔의 나락으로 빠져든다고 했습니다. 일 손 놓게 하는 소라언니 노래들. (반자본주의 가요!) 암튼 이소라는 실연의 아픔에 탁월한 걸로 봐서 사랑하면 몰락하는 타입일 것 같다고 논의가 모아졌죠. 저를 필두로 “나도 그렇다” 여기저기서 공감녀 등장하고 “나 역시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는다”는 화이트의 고백이 있었죠. 6집의 숨은 보석같은 곡 <별>을 낭독했어요.
‘나 아무리 원해도 넌 도무지 닿을 수 없이..
움켜진 틈 사이로 흐르는 너는 모래처럼 스르륵
비슬거리는 이 마음은 마른 잎 되어 구른다’
참,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소라의 가장 시적인 가사 <바람이 분다>를 몽월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들었답니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 은미;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시집을 들고 온 그녀. 유하의 <천일馬화>. 유하는 <결혼은 미친짓이다><비열한 거리><말죽거리 잔혹사> 등 영화감독으로도 유명한 시인이죠. 은미는 대학 졸업하고 백수생활 때 진도로 여행을 갔다가 버스 기다리면서 터미널 근처 서점에서 구입하여 읽었다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고민하던 그녀에게 다가온 시를 낭독했습니다.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화살처럼 가슴에 콕콕 박히는 잠언같은 니체적 시어들.
‘나를 움직이는 연료는 침묵...
나는 아무 것도 목표하지 않는다...
산책가는 누구를 추월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은 무한한 곡선...
산책가는 늘 길 뒤편에 남아 있다
풀잎 하나 사소한 흔들림에도
생의 시간을 확장해가며’
# 한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8>
유하는 유하를 부른다. ‘나는 유하가 좋더라' 평소에 노래부르고 다니던 그. "유하도 시세미나에 넣으면 안 돼요?" 묻곤 했죠. 혼자 읽어도 충분히 좋은 시는 각자 읽기로한 방침에 따라 기각. 일구월심 유하를 사랑한 청년, 한준도 유하시집을 준비해왔어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8>를 낭독했습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사랑의 보안사 압구정 분실을 폐쇄함과 동시에
지금 이 순간부터 여자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튕기거나, 두 남자 이상을 만나는 여자를 보면 무조건 발포하라
뭐?
똥 뀐 놈이 성낸다고?’
시가 너무 엽기 발랄하여 웃음이 터졌죠. 단단이 '오렌지족'이 성행하던 압구정 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내려주기도 했고요. 한준다운 경쾌하면서도 한없이 진지한 감수성. 그런데 여자와의 전쟁이 웬 말이냐. 하도 웃겨서 여자한테 원한 감정 있느냐? 물었더니 손사래를 칩니다. “아니요. 감히 여자와 전쟁을 하겠어요. 저는 엎어지는 남자인데!” 한준은 기다립니다. ‘같은 병’에 걸리고 싶은 여자를 . 부디 내년에는 꼭 만나서 성탄절 시세미나에는 동반참석하길 기원하며!
# 안단테: <예수일병구하기>
오늘의 기타리스트. 물리학도 안단테. 니체와 푸코를 공부 중이며 글 솜씨가 탁월하고 ‘넥스트’를 좋아하여 신해철이 운영하는 기타학원에 다니고 있는 다면체 젊은이입니다. 주 예수 탄생을 기념한 날이 날이니만큼 신해철의 ‘안티크리스트’ 버전의 노랫말을 준비해왔다고. 독설가 신해철의 면모를 확인케 하는 가사들. 그는 말합니다. “보통 기도는 잘 되게 해달라고 빌잖아요. 신해철의 <기도>는 ‘절망의 나락 끝까지 떨어지게 하소서’라고 하거든요.” 안단테의 반골기질은 동경합니다. 몰락이 아니면 달리 살줄 모르는 자를! <예수일병구하기>도 꽤나 락적입니다. 라임이 입에 착착 감기는 등 음악적 언어적 성취와 신해철의 똘끼가 돋보입니다.
‘주 예수를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삐까번쩍 예술적 건물 올릴 적..
미움을 파는 게 사랑보다 쉬우니
나랑은 협박 때리고 너랑은 윽박지른다
이놈은 이단이요 저놈은 배반이요
딴놈은 개판이요 그래 이 몸은 사탄이요’
# 은유; <꿈속에서>
저는 전람회의 <꿈속에서>를 신청했습니다. 시적인 노랫말이 흐르는 수많은 명곡을 뒤로 하고 이 노래를 고른 이유는 기타연주자 안단테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요. 대학가요제 대상수상곡답게 열정과 감성이 잘 드러났죠. 아름답고 질긴 악몽으로 점철된 청춘에 대한 비유로도 읽히고요. 운율도 좋습니다.
‘눈물로 젖은 내 술잔 속에
나의 웃음이 또 한숨이
출렁이는 달빛에 흘러가네
날 깨워줘 네가 없는 꿈속은 난 싫어’
# 몽월; <Just the two of us>
성탄절이 되면 생각나는 그 노래~ “결혼 1년차 성타절, 서른을 한 달 남기고 휴가 얻어 인도로 배낭여행을 갔어요. 기차를19시간 24시간 타고..” 몽월은 시체가 타는 바라나시 게스트 하우스의 쓸쓸한 밤. 고된 밤. 그리하여 눈물 쏟아지던 밤에 들었던 노래라며 뜨거운 사연과 함께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스맛폰에서는 <Just the two of us>가 흐르니 부드러운 카푸치노 같은 목소리가 더욱 돋보인 시간. 그녀는 명실상부한 ‘오미희의 가요광장’스러운 진행을 선보였죠.
‘Just the two of us We can make it if we try
Just the two of us Just the two of us
Just the two of us Building castles in the sky
Just the two of us You and I’
# 은재: <빈집>
시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듯 보이는 그녀. 왠지 황석영 소설 여주인공 이름같은 느낌을 주는 은재는 음악얘기에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종합예술인. 특별히 골라온 시는 없고 질문이 있다면서 기형도의 <빈집>을 읽었죠. 첫 행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와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사이에 숨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라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나머지 회원들은 그걸 왜 알아야하는가, 안 궁금하다며 답변 회피 후 내린 결론. “기형도 시집 선물해준 남자의 작업용 멘트가 아닐까?” 이렇게 그의 질문, 빈집에 갇혔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았던 겨울 안개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소영: <사랑하게 되면>
국어교육과 학생신분으로서 평소에도 예비교사의 감각과 품위를 잃지 않는 그녀.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좋을 시와 시험문제 유형파악 독해로 시세미나에 긴장을 불어넣곤 하는 소영은 안치환 노래를 골라 와서 7080회원들을 놀라게 합니다. 고등학교 때 초청강연 온 성악가가 피아노를 치면서 불렀는데 참 듣기 좋았다는 사연이 있더군요. 안치환의 <사랑하게 되면>을 감상하고 노래가 끝나니 다들 무릎을 칩니다. “아, 이 노래가 그 노래였구나.” 사랑하게 되면 날고 싶다. 훨훨 날개 짓이 두고두고 귓가에 맴도는 노래.
‘훨훨훨훨 날아가자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으로
훨~훨 훨훨 이 밤을 날아서
그댈 품에 안고 편히 쉬고파
나를 잠 못들게 하는 사람아’
# 현민; <샤도우 댄스>
사회학적 관점에서 엄밀한 시적독해를 시도하면서도 ‘대중가요’와 ‘시’의 통섭을 도모하던 현민. 가령 “기형도가 유재하라면, 심보선은 김동률 같아요.” 뭐 이런 발언으로 세미나를 유쾌하게 했죠. 그는 시를 타이핑한 후 종이를 아끼기 위해 삼등분 커팅해와 나누어주었습니다. 시세미나가 종반으로 흐를 무렵 긴 종이를 받은 우리는 ‘수료증’ 내지는 ‘상장’ 혹은 ‘성탄카드’ 같은 그것을 마주하고 기뻐했습니다. 제목은 <샤도우 댄스>인데, 가수밴드이름이 완전 특이했죠.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하하. 이건 뭐 이상의 시도 아니고 뭔 말인가 했더니, 옛날 남자와 여자가 스텔라를 탔다‘는 뜻입니다. 노래도 몽환적이에요.
‘그림자와 함께
춤추다가 아
내 동작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널 보았네..
우리는 많아지고
점점 더 커져가네’
몽월의 검색으로 즉석 음악 감상. “혼자 춤추는 곡”이라는 현민의 설명에 전원 동의했습니다. 병역거부로 18개월여 수감기간을 거친 그는 감옥생활자는 정말 할 일이 없다며 몽상이나 환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게 없으면 살 수 없어요.” 더불어 내년 연구과제가 ‘몽상/환상/공상/망상/상상’이라고 발표를. 기대 돋는 주제에 다들 환호. 특히 혜진 심리상담가가 격하게 호응합니다. “외부와 관계나 활동을 만들 수 없으니까 환상을 만들어내거든요. 고립과 단절이 심해지는 게 문제죠.” 혼자 하는 환상놀이는 자칫 파멸에 이를 수도. 하지만 함께 키워가는 환상은 삶을 풍요롭게 하죠. 환상열차 시세미나 종착역이 점점 다가옵니다.
# 단단; <카페인>
이번 시세미나에서 뭐 읽을까 생각하자마자 떠올랐다는 곡. ‘못mot’의 전곡을 하얀 종이에 손수 타이핑해왔습니다. 와! 얼마나 좋아하면! 다 같이 감상한 노래는 <카페인> 나른한 보컬이 멜로디를 깨워주는 아주 매력적인 곡입니다. 공공미술가 단단은 마시는 카페인이 아니라 듣는 카페인에 취해서 밤을 지새우는 모양입니다. 노래가 끝나자 조용한 탄성이 터집니다. “아우~ 좋다” “득템했다”
화이트가 음반을 사려면 1집이냐 2집이냐 물으니 재은이 거듭니다. “못은 전곡이 다 좋아요.” 단단은 하나로 꿰어지지 않는 노랫말이지만 그래서 좋다고 가사의 의미를 되짚어줍니다. 이미지의 단절이 가져오는 파편적인 율동이 돋보이는 가사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못이 원래 무명이었는데 헤드윅 감독의 인증을 통해서 국내에 알려졌다고 재은이 증언합니다.
‘늘 깨어 있고만 싶어 모든 중력을 다 거슬러
날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많은 허전함을 내게
하루는 그리 길지도 않고 지루하다 할 것도 없는데
난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는데’
# 성복; <꿈에>
스페셜게스트로 참가한 그는 “시세미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라는 아내의 말에 속아서 왔다며 스스로를 유일한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매우 수줍어했습니다. 그래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사연에 귀 기울이고 음악에 심취하고 가끔씩 자주 웃음을 터뜨리는 거, 모두들 보셨을 겁니다. 이날의 엔딩 신청곡은 그가 “가슴을 후벼 파는 노래”라며 고른 조덕배의 <꿈에>
‘난 눈을 뜨면 사라지는 사람이여
난 눈 못 뜨고 그대를 또 보네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오늘 밤에 그대여 와요.......’
이것이 꿈이라면 눈을 뜨고 싶지 않고, 이것이 기차라면 내리고 싶지 않은 성탄특집 시세미나는 안단테의 <춘천 가는 기차> 연주 및 노래를 마지막으로 끝났습니다. 성복에서 성복에로.
다음 주 12월 31일에는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애정 하는 시집이라서 벌써 설렙니다. 한 문학계간지에서 시인을 대상으로 자신에게 영향 끼친 시집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백석, 정지용, 서정주, 김수영 시집과 함께 이성복의 이 시집이 뽑히기도 했답니다. 현민의 연구주제 '몽상/환상의 아름다운 시적 경지'를 느낄 수 있고, 언어형식의 수준도 뻬어난 시편들이오니 정성스레 향유하시길. 발제는 소영이 준비합니다. 송구영신의 밤, 시와 함께 하고픈 분들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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