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과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
혁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기울길 바랐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볕드는 그런 세상을 꿈꾼 건 맞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말 통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 시어머니가 아들사랑을 이유로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는 세상. 힘 없는 사람을 보고 같이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런 세상.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리지 않는 그런 세상. 광장에 나가서 혁명할 주제는 못되고 방구석에서부터 내 주변부터 정리하면서 잘 살아보려했다. 내가 몸 담은 곳, 내 생활반경에서 말이다. 살면서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 같은 날감정을 글로 써보고 나누고 싶었다. 뭔가라도 영양가 있는 생각을 짜내서 그 한방울씩이라도 나누다보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희망.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고 있다. 이방 저방 떠돌면서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피와 살로 삼아 쓴다. 덕이 되진 못해도 남에게 상처주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느데 그럴 순 없을 거 같다. 다 좋을 순 없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방을 바꾸면서 내 친구 니체를 앉혀놓고 약속한다. 누구에게나 이해받는 글을 쓸 수는 없지만 나를 속이는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글 쓸 때 사람들은 이해되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원한다. 어느 누군가가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자는 어느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고귀한 정신과 취향은 자신을 전달하려 할 때 청중도 선택한다. 그는 청중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단기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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