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일년에 두 번 <직녀에게> 노랫말을 바꿔 부르고 싶다. 엄마의 속도 모르고 꽃수레는 그나마 다니던 학교마저 안 가도 된다며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난 두려웠다. 말하기 싫어도 말해야 하고 배고프지 않아도 밥해야 하고 혼자 있고 싶어도 둘이 있게 되는 방학이 내겐 너무 잔인하다. 여튼, 방학 다음 날 꽃수레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계획표를 그려서는 24시간을 분배하더니 여름방학 특집 ‘강령’ 같은 것도 별도로 작성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놀기였다. 신나게 놀기, 많이 놀기, 행복하게 놀기. -.-;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는 외롭다. 특히 방학. 학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를 도통 만날 수 없다. 혼자 놀기엔 여름 해가 길다. 꽃수레는 아침에 일어나 그림 한판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만들고 만화책 좀 보다가 학습지 하다가 앞집 아이 스케줄이 빌 때면 같이 논다. 초등학교 1학년 동생이다. 방학특강 들으러 매일 영어학원을 가는데 그 애 오기만을 현관문에 귀 쫑긋 세우고 기다린다. 가끔 놀러갔다가 풀이 죽어 돌아오곤 한다. ‘피아노 선생님 오셔서 왔어...’ ‘오늘부터 수영 다닌데...’ ‘구몬이 밀렸다고 다 하고 놀 수 있대...’
그럴 때면 지금이 기회다 싶어 ‘너도 학원에 갈래?’ 꼬셔보지만 이내 도리질이다. 반은 실망하고 반은 안도한다. 사실,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틀에 박힌 생활을 척척 해내는 걸 원치 않는다. 그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나중에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학습량을 다 감당해야 한다. 생각하면 하지 못할 강도 높은 반복학습.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일상. ‘왜?’가 없는 삶. 그것은 삼성이 원하는 인재가 되는 지름길이다. 우리사회에서 ‘착실한 아이’란 외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체로 길들여졌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러니 성적이 다소 섭섭하더라도 ‘노예지수’가 높은 아이로 키우진 말자 다짐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언뜻 불안하다. 수레랑 둘이 슈퍼에 다녀오다가 종종 반 아이들을 만난다. 영어학원 가방 매고 오는 아이들과 잠깐씩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제법 똘똘하고 다부지다. 총총히 사라지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못난 엄마는 수레한테 “누구는 공부 잘하지?” 묻고 만다. 그러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수레가 되묻는다. “엄마? 누구가 부러워? 나도 저렇게 야무지면 좋겠어?”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이내 부끄러워서 아니라고 엄마는 네가 튼튼영어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물고기도 잘 키워 대견하다고 수습한다.
꽃수레의 재능. 여름방학을 보내면서 한 가지 발견했다. 음악 신동도 미술천재도 아니다. 살림영재.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일에 능하다. 집에서 물고기(구피)를 키운다. 점싹이라는 새끼 물고기 한 마리가 제법 커서 세 마리를 더 사다 넣었다. 그랬더니 수레는 황점싹. 이등싹. 박납싹. 김흥싹 등등 무슨 고전동화에 나오는 첨지 같은 이름을 붙여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보살폈다. 구피 사총사는 더욱 날랜 몸놀림으로 물속을 유영했고 새끼를 순풍순풍 낳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른 4마리, 새끼 26 마리. 총 30싹이로 식구가 늘었다. 이 기적의 드라마. 총연출은 오롯이 꽃수레다.
식탁에 잔멸치 볶음이 나오면 두 손을 귀에다가 나팔처럼 모으고 어항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잠시 후, “뭐라고 점싹아? 엄마, 이 멸치는 점싹이의 사촌 형이래.”라는 대사를 친다. 백화점 생선 코너에서 고등어를 보면 또 집에 있는 납싹이와 교신을 시도한다. “이 고등어는 20억년 전 죽은 납싹이 조상이래.”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 흥싹이가 배고파 죽겠대. 자기만 먹지 말고 나도 밥 좀 주래” 하고 물고기 밥을 꺼낸다. 이제는 새끼구피 26싹이까지 생겨서 일손이 더 분주하고 말이 더 많아졌다. 수시로 어항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그 작은 것들 몸통에서 지느러미가 나오고 꼬리가 생기는 아주 미세한 차이까지 잡아낸다. 핸드폰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자랑하고 납싹이의 옆모습, 앞모습, 뒷모습, 위에서 본 모습 아래에서 본 모습 등 성장과정을 그림으로 남긴다. (하얀 종이에 하늘색을 칠해 어항 뒷배경을 만들어주었다)
(새끼는 몸집이 클 때까지 따로 키워야 한다) 꽃수레가 이렇게 재미나게 구피를 키우는 것을 지켜본 친구 한 명이 덥석 어항을 샀다. 그 집에 놀러갔더니 ‘토끼전’에 나오는 대궐 같은 어항과 수초에 우린 모녀는 기가 죽어버릴 정도였다. 한 달 후. 친구네 물고기 이십여 마리가 몰살했다는 비보가 들려 왔다. 우리는 새끼를 또 낳았다고 했더니 그 화려한 어항을 우리 집에 갖다 주었다. 이틀을 방치하다가 수레의 등쌀에 못 이겨 납싹이들을 옮기기로 했다. 어항이 커서 바가지로 물을 날랐다. 몇 번 왕복하니 귀찮아서 “니 물고기니까 니가 물을 나르라”고 수레한테 떠넘겼다. “알았어 내가 할게~”라며 흔쾌히 바가지로 물을 나르던 수레. 지도 힘들었는지 바가지를 들고 쩔쩔매면서 푸념하듯 내뱉는다.
“에유. 납싹이들 죽기 전에 큰 집에서 호강 한번 시켜줄라고 했더니 이렇게 힘이 드네!”
웬 할머니가 들어앉은 듯 구성진 대사에 나는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큰 집에 살고 싶은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꽃수레는 신바람이 나서 중얼중얼 “조금만 기다려라” “다 돼 간다”며 30싹이와 활발히 교신했다. 저것이 어린 아이일까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작은 수족관을 운영하거나 작은 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가 화초를 아주 잘 키우셨다. 죽어가던 화초도 살려내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식물원을 방불케 했고 동네에서도 ‘화초 잘 되는 집’으로 유명했다. 난 화초도 못 키우고 애완동물도 별로다. 사람 아닌 것에 좀처럼 마음을 주지 못하는 무정한 여인이다.
살아있는 것을 돌보는 그 성가신 일을 즐기면서 창작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꽃수레. 이박삼일 휴가 가서도 안절부절 ‘납싹이들 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수시로 근심이 서렸다. 속초에서 회를 먹을 때는 “등싹이 증조할아버지의 친구 분”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지 오빠한테 “만날 똑같은 레퍼토리 반복 하냐. 시시하다. 지어내지 말라”는 구박을 들어가면서도 꿋꿋하다. 옷을 입은 채 바다에 철푸덕 앉아서는 “납싹이 고향이라 더 아늑하다”며 싱긋이 웃는다. 자기가 구피라도 된 양 물 속에서 파도에 밀려갔다 밀려오며 좋아라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좀 ‘이상한 아이’로 보일 지도 모를 대사들을 연신 남발해가면서.
이것은 물고기-되기. 유사성 돋는 미메시스 놀이가 아닌가. 벤야민은 이를 고급한 능력으로 보았고 현대인의 미메시스능력 쇠퇴를 지적했다. 어린아이는 자연과 위계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으며 자연의 지배가 아니라 자연과 동등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한다. 즉 사물과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미메시스적 능력은 주체를 변화시키는 역사적 능력인 것이다.
꽃수레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납싹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물고기가 되어 바다에 몸 담금까를 생각하니 지금의 연극적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잠시나마 영어수학 선행진도를 걱정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드는 방편으로서의 공부라면 아이와 대화하면서 천천히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자기-배려다. 푸코는 더 우수한 존재, 더 윤리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자기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존재미학’ 개념을 설파했다. 어차피 삶은 스타일. 그러니 저마다의 존재미학을 연기하는 성격파 배우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날마다 유치한 쪽대본으로 열연을 펼치는 꽃수레의 존재미학쇼, 본방사수와 독점시청이 보장된 나는 행복한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