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차오르는말들

명절 다음 날


명절 전날, 그러니까 여친과 헤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배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 받아들여. 이유를 따지지 마. 이 세상에 논리적 인과성을 비켜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 너처럼  헤어진 이유라도 알자며 매달렸던 인생선배들이 얼마나 처참히 버려졌는가를 예로 들며, 나는 연애사건을 포함한 '삶의 부조리'를 연신 설파했다. 내겐 그랬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부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받아들여야하는 현실로 닥쳤다. 여자에겐 결혼이 삶의 불합리를 체험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제도장치다. 순종과는 거리가 먼 인간유형인 나조차도 대 시댁관련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행한다. 생존본능의 발동이다. 제사나 명절은 일박이일 극기훈련 가는 기분으로 임하며 실제로도 혹독한 타자체험의 장이 펼쳐진다 

시댁은 그 자체로 모델하우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적재적소에 정물처럼 놓여있다. 먼지가 침입할까봐 베란다와 부엌 등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고리까지 걸려있다. 숨이 턱까지 막히는 적요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시어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주름 잡힌 정장바지를 입고 고상한 단추가 달린 셔츠를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물일을 하신다. 말이 없으신 시아버님은 늘 신문이나 책을 보며 시동생과 신랑은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시댁에 갔을 때는 이 장면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명절이라 하룻밤 자고 올 때는 빳빳하게 풀먹인 이불마저도 왠지 부담스러웠다. 행동이 부자유하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유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레알 감옥이었다.

위생종결자 시어머니의 살림살이, 특히 주방용 가재도구는 신상의 광택을 자랑한다. 수세미는 싱크대용, 냄비용, 일반용, 행굼용 등 종류별로 너댓 가지다. 처음엔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릇은 찬물로 닦고 뜨거운 물로 소독한 후 얼룩이 남았는지 형광등에 비추어본다. 다이아몬드 보석이 번쩍거려야 싱크대에 들어간다. 신혼 때 설거지 불합격 판정을 몇 차례 받았다. ‘결혼 전에 배우지 못했구나!’ 난데없는 모녀 비하발언에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어느 해 명절에는 유학 간 후배 두 명에게 연달아 국제전화가 와서 자리를 비웠다가 시댁에 와서 일은 안 하고 전화만 한다는 뒷말을 들었다. 온통 불가해한 상황. 무기력했다. 시어머니의 도덕적 판단은 나의 경험세계 외부의 영역이었기에 그에 대응할 어떤 언어도 찾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명절이면 무슨 직장 상사와 숙박면접을 보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날벼락은 명절 포함 일 년에 네 번 정도 국지성 호우처럼 지나갔다. 그 비를 쫄딱 맞고 나면 감기처럼 일주일을 앓곤 했다.

결혼 십년 지나고 이십년 가까이 되자 시어머니 기력이 쇠잔해지고 당신이 몇 차례 풍파를 겪으면서 요즘은 비교적잔잔한 호수 국면이다. 청결감각은 여전하시다. 엊그제는 가만히 시어머니의 동선을 바라보았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흘러가는 동작들. 계란을 꺼내면 손을 씻고 싱크대 문고리를 잡고서도 비누칠해서 손을 닦는다. 후라이팬은 그렇게 자주 쓰는 데도 먼지가 앉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묶어놓는다. 전을 부칠 때는 기름이 튈까봐 바닥과 싱크대 조리대에 신문지를 깔고, 끝나면 걷어내고 재차 걸레질을 한다. 요리와 요리 사이, 베란다로 나가더니 위생장갑을 끼고 커다란 락스통을 들고 오신 시어머니 말씀하신다. “싱크대 소독해야 돼!” 나는 순간 시어머니가 마스크를 쓴 방역과 직원으로 보였다. ‘여자가 일 못하면 죽은 목숨이고 일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시어머니는 가사노동의 시간을 최대한 늘림으로 인해 자아존중감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덕분에 나의 명절 노동량은 많지 않다.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책을 보거나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옆에 서서 주방보조 노릇을 하며 시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야 한다. 명절날은 차례상을 물리자마자 전신 명품으로 치장하고 나타나는 친지에게 무상급식 투표율 60%에 빛나는 그사세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듣는다. 내용은 입에 금수저 물리려는 부모들의 영웅담과 승진과 출세담, 건강정보 등 온통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얘기다. 출생의 비밀과 불륜 드라마처럼 매번 재생산되는 이야기가 한없이 지루하다. 그렇다고 리모콘으로 끌 수도 없다. 귀 있으니 들려온다. 선택한 적 없고 원한 적 없는 그들과의 배치에서 내 의지는 교란 당한다. 한참을 듣고 있으면 세상이 낯설어진다. 신경질 난다. 나 혼자만 덩그마니 초라하다. 외롭다. 몰랐다. 크게 하는 일도 없는데 대관절 명절이 왜 피곤한가. 이번에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이 없고 할 수 있는 이 없어서 그런 거 같다수동성의 장에 던져진 채 의욕하지 않기’ ‘행하지 않기로 시간을 보내야 하니 극도의 피로함이 밀려올 밖에 

기름이 배이고 소란이 지나간 머리를 식히고자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설거지까지 마치고 밤 9시 집을 나섰다. 단지 앞 파스쿠치에서 갔다. 2층 창가로 플라타너스가 하늘거리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젊은 친구들이 혼자서 혹은 연인들이 기대어 앉아 노트북 켜고 공부하고 있다. 그 밤에 자리가 꽉 찼다. 겨우 한 자리 구해 앉아서 라즈베리차를 홀짝거렸다. 강력한 에어콘 바람이 살갗에 닿으니 세포가 탱클탱클 살아났다. 재치기가 나고 정신이 깨어났다. 공부하는 신체로 모드변환. <이 사람을 보라>를 폈다. 활자가 두 눈에 달려든다. 영혼을 상승시키는 니체의 말. 헤어져있던 애인과의 상봉처럼 눈물겹다 

무화가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을 터뜨린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불어대는 북풍이다. 나의 벗들이여, 무화과가 떨어지듯 너희에게는 이 가르침이 떨어진다: 이제 그 열매의 즙을 마시고 그 달콤한 살을 먹어라! 온 사방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차오르는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셀프구원  (10) 2011.10.06
시험감독, 그 심란함에 대하여  (7) 2011.09.29
'The Piano' ost  (6) 2011.09.08
꽃수레의 존재미학  (20) 2011.08.17
보편적인 노래 보편적인 하루  (8) 2011.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