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코뮨은 다양체
매주 화요일에 R식구들끼리 회의를 한다. 이번 주는 금요일 쥐 그래피티 선고 공판, 그 이후 국면 대책을 논의했다. 기소자 2명이 입장이 달랐다. ‘나는 즐겁다 끝까지 싸우겠다’와 ‘나는 피곤하다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당사자를 비롯해 남녀로 편이 갈렸다. 그래피티 사건이 법과 예술의 대결구도가 됐고 우리가 잘못한 게 없으니 현장정치 공부도 할 겸 끝까지 가자는 남자들, 지금까지 싸운 것으로 충분하니 지리멸렬하게 끌지 말고 한 명이라도 원하지 않으면 다 같이 끝내자는 여자들. 둘 다 일리 있다. 필요한 지적이다. 그런데 묘했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남자의 무한정복욕망과 여성의 정서공감능력이 확연히 드러났다.
지난주 일이다. 난 회의시간이 다 되어 연구실에 도착했다. 책장의 배치가 바뀌어 있었다. 분리수거 봉지를 들고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한 동료의 표정이 안 좋았다. 연구실 생활이 지치고 힘들다고 했다. 늦게 온 나도 미안했지만, 주변상황에 아랑곳없이 늘 책상에 붙어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몇 명이 떠올랐다. 사정이 있겠지만 미웠다. 얄미웠다. 나는 그 문제를 안건에 올렸다. 현재 연구실은 분리수거, 짐 나르기, 밥 짓기 등 소위 허드렛일이 몇 명에게 집중돼 있다. 같이 나누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랬더니 한 남자회원이 ‘나는 아까 책장 나르기가 재밌었다. 너무 민감한 반응 아이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우리 남편의 말이다. 설거지가 힘들다고 하면 “도대체 설거지가 뭐가 힘드냐, 그냥 두면 내가 하겠다”고 응수한다. 나도 안다. 그릇 몇 개 헹구는 행위는 결코 힘들지 않다. 하지만 ‘설거지 자체’만 하는 경우는 없다. 밖에서 일하고 집에서 글 쓰고 청소하고 애들 밥 먹이고 그리고 설거지를 해야 하니까 힘든 거고, 그냥 두면 물 마실 컵조차 없으니까 기어코 고무장갑을 끼는 거다. 그런데 남편을 비롯한 남자들은 어떤 사안을 실재적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고 스티커 떼듯이 삶에서 똑 떼어서 ‘명제’만 사고한다. 배경을 휘발시키고 ‘사실’만 중시한다.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불쑥’ 저지르는 데도 선수다. 통계와 수치가 아니면 상황 파악에 대체로 둔감하다.
자기의 욕망에만 충실한 남근적인 성향이다. 어느 한 사람의 인격이 통째로 그렇다는 게 아니다. 연구실이든 집이든 어디서나 마주치는,그 남성성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린다.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성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성성이 늘 선이고 남성성이 꼭 악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때로 여성의 예민함과 오지랖이 부담스럽다. 때로는 남성의 단세포 정신과 논리 지향성을 사랑한다. 남성성을 여성성으로 동일화시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제각각 이질적인 특성을 거세해버려 동일화의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면 '소통의 피로감'은 없겠지만 변화도 생성도 없다. 모두가 같아지는 순간 대화는 독백이 되고 삶은 정지된다. 그래. 삶을 사막으로 만들 순 없다. 나는 숲을 원한다.
다른 존재와 부딪침으로 인해 상처와 불쾌가 남더라도 돌이켜보면 그 자극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성장했다. 1박 2일 고민 끝에 서로 다르기에 함께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코뮨은, 만물은, 동일체가 아니라 다양체다. 수업시간에 얘기한대로 치약을 아래부터 짜는 사람과 위에부터 짜는 사람이 모여 살기는 쉽지 않다. 일명 치약전쟁. 그 사소한 다름에서 어떤 유의미한 공통리듬을 생산하는가가 관건이다. 돌고돌아 힘겹게 원점으로 돌아간다.
# 2. '나'라는 공동체
7차시는 <코뮨주의 선언> 서문을 읽었다. 코뮨주의에서는 '나'를 고유성이 아닌 잠재성으로 규정한다. 나의 본질은 '나 아닌 존재가 될 능력'에 다름아니다. 글쓰기 과제는 삶에 낯선 요소가 침투해서 나를 비약시킨 경험 쓰기다. 음악. 운동. 걷기. 버섯. 김치. 연인. 친구. 선배 등 다양한 소재가 쏟아졌다. 체력장 20점 만점에 18점 받았던 경숙샘은 운동과 담쌓고 살았다. 대학에서 우연히 배운 테니스에 재미를 붙였다. "점수 부담이 없으니 그 때부터 비로소 운동을 즐길 수 있었다"고. 회사원이 되면서부터 걷기로 출퇴근하는 운동 마니아다.
경숙샘은 본문에서 “내 안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것, 내 안의 타자성을 억압하는 것, 외부 타자와의 공통작용을 거부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가 쓴 글에 들어있다. 학창시절 ‘나는 운동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개인의 ‘고유성’을 규정했고, 그것은 자기 안의 ‘타자성’ 즉 잠재된 운동능력을 억압한 결과였다.
"코뮨주의는 나는 사유한다.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라는 이름 아래서 사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 3. 내 안의 낯선 존재
명운씨는 ‘김치’를 통한 시어머니와의 소통을 기록했다. 신혼 초시어머니가 종류 별로 담가주는 전라남도식 김치가 짜고 매워 '처치 곤란'이었다는 그. 시간이 흐르면서 시어머니의 뭉근한 사랑에 전염되고 입맛의 변화가 일어난다. “결혼 전에 시댁식구를 새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싫고 겁이 났다. 그래서 김치를 보면 그렇게 먹기가 싫었나보다. 어머니를 시골할머니처럼, 친정엄마처럼 느낄 때는 김치뿐 아니라 처음 먹어보는 음식도 먹기가 수월하고 맛이 있다."
음식소통기 2탄. 지오씨는 ‘버섯의 신세계’를 찬미했다. “삼겹살을 구우며 한 쪽 구석에 표고버섯을 고이 뒤집어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설렘은 입 안 가득 풍부한 맛 이상의 기쁨이고, 팽이버섯과 느타리버섯을 알기 전 두부만 댕강 썰어 넣은 25년간의 된장찌개를 생각하면 구슬프기 그지없다.” 유독 편식이 심했으나 버섯을 먹으면서 다른 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처럼 음식을 대하는 태도는 삶의 자세와 관련이 깊다. 낯선 것을 몸에 섭취해 즐거움을 생산해본 사람은 다른 이질적인 것과도 쉬이 공통관계를 형성한다. 개방적인 신체가 된다. 절대 야채를 안 먹던 사람도 암선고를 받으면 온갖 야채를 섭취하고 불같던 성격도 차분해진다. 동일한 인물이 맞나 싶게 표정이 달라진다.
존재변신의 최고봉은 사랑이다. 사람만큼 사람을 변하게 하는 존재는 없다. 특히 연인관계라면. 재향 씨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그녀’ 이야기를 낭독하여 강의실을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연애’를 하게 된 나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레 은경이가 먼저 생각나게 됐고 잠시라도 연락이 안 닿으면 불안한 마음에 초조해지기 일쑤였다. 본디 사람과 깊게 엮이기 보다는 혼자 알아서 해결해가길 좋아하는 모난 성품인지라 이 모든 게 내게는 큰 변화를 요구했다.”
사랑을 하기 전에는 모른다. 나의 질투심과 인내심의 함량을. 이기심의 한계를. 사랑은 내 안의 모든 낯선 존재를 들춰내고 들쑤신다. 그래서 위험하고 때로는 치명적이다. 나를 다 줄 테니 너를 달라. 동일화의 욕망이 강력해진다. 이런 감정은 고통의 씨앗이다. 재향 씨는 나와는 너무 다른 존재인 그녀와의 소통으로 고통을 겪었고 그 과정을 거치며 “낯선 모습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지오씨, 재향씨, 명운씨의 총체적 변화를 코뮨의 언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를 가장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로부터 가장 먼 데서 온다. 낯선 존재와의 마주침이 내 안의 낯선 존재를 불러낸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그 존재가 바로 나이다.”
# 4. 분리와 차별을 잇는 '접속사'
‘선배와 후배' 이야기를 들려준 지혜 씨. 한 선배가 있다. 큰 목소리로 투덜대고 낮술까지 마시는 진상이다. 후배들에게 미움 받던 그 선배가 신입사원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간다. 신입사원들의 사랑을 받은 선배는 점점 유쾌하고 부드러워진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변하는 걸까." 유지태 버전으로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변한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인 변화를 지켜본 지혜씨는 “직장 동료를 수없이 타자화, 사물화를 통해 소외시켰던 내게 신입사원들은 사이를 벌려 놓는 분리사 대신, 다른 존재들의 결합을 잇는 접속사 역할을 해줬다"고 술회한다. 사람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어떤 인연의 배치에 놓이느냐에 따라 무한변용이 가능하다. '과'라는 분리사로 분리와 차별을 선언하지만 않는다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물, 인간과 기계라는 말에서 ‘과’라는 접속사에는 인간의 오만함이 잔뜩 묻어난다. 이 접속사는 도무지 접속을 거부하는 접속사다. 그 말이 표시하는 것은 인간은 자연이 아니고, 인간은 사물이 아니고,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접속이 아니라 분리와 차별을 선언하는 단어다. 접속사가 아니라 분리사인 셈이다."
# 5. 코뮨주의 에티카는 '시도'
22년 죽마고우가 삼성에 입사하면서 한솔씨에게 문자를 남겼다. ‘파란피가 흐를 때까지’ 이 말은 삼성라이온즈 양준혁 선수가 파란유니폼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뛰겠다는 선언에서 유래한다. 약간은 섬뜩하다. 과로사할까 염려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성장배경과 가치관이 달랐던 두 사람. 그래서 친구가 됐고 그래서 멀어지고 있다. 한 사람은 삼성의 파란피가 흐르고 또 한 사람은 인문학의 빨간 피가 흐른다. 이들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한솔씨는 “우린 계속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어린 시절 추억의 끈이 아닌 어느 순간 멈춰버린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그런 시도(attempt) 자체가 소통이라고.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이, 즉 사건화의 촉발점으로서 좋은 만남을 꾀하는 행동이 삶을 구성해 나간다. 그것은 선물을 주는 것이고, 방문을 열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며, 함께 지붕을 고치고 밥을 먹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이기도 하다. 사건으로서 행동은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삶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이념적 선택이 아니다. 실로 코뮨주의의 에티카는 이 모든 사건의 연쇄를 ‘좋은’ 것들의 만남으로, 해체가 아닌 구성과 지속이 되게 하려는 노력(conatus)이 아닌가?”
글에 팽팽한 긴장이 맴돈다.이념이 아닌 ‘행동’으로 소통을 꾀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그런데 생생한 에피소드가 없고 추상적인 개념어로 풀어가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아쉬웠다. 자본의 신체에 강력하게 매달려는 그 친구와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한솔씨는 요즘 20대의 전형적인 두 부류다. 이들의 소통장애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단지 개인의 선택문제는 아닐 것이다.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젊은이들. 자유와 젊음과 돈과 여유, 그리고 우정까지 빼앗기고 있다. 조용필 노래대로 일찍부터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다.' 글에 담긴 내용은 암울하지만 표현은 아름다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비포선라이즈’ 대사의 원문 인용. 이 몇 줄 문장이 ‘코뮨주의 선언’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 놀라웠다.
# 6. <비포선라이즈>의 코뮨성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If there's any kind of magic in this world, it must be in the attempt of understanding someone, sharing something. I know, its almost impossible to succeed, but... who cares, really? The answer must be in the attempt.”
잠시 강의실이 술렁였다. ‘비포선셋’은 내 인생 최고의 영화이다. 아이디로 삼을 만큼 애착이 강하다. 귀선 씨도 ‘비포시리즈’는 멋진 영화라고 엄지손가락 치켜세웠다. 한솔씨는 나처럼 DVD 세트 및 원서까지 갖고 있었다. 우리가 흥분하자 경숙샘은 ‘그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했다. 경수 씨도 후기에 ‘영화를 다운받아 놓았다’고 썼다. 사물과의 소통도 배운 마당에 <코뮨주의 선언>과 <비포선라이즈>의 소통은 이번 수업의 또 하나의 수확이다.
한솔씨는 나중에 댓글로 과제의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 글의 처음 목표는 친구의 현실과 나의 이상을 사회적인 문제로 풀어가는 것이었어요. 순응과 저항, 20대의 선택의 문제, 자유를 박탈당한 젊은이들의 문제, 경쟁 등등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나와 친구의 소통의 과정이 곧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실마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쉽지 않더라고요.”
# 7. 웃으며 시작하자
개인적인 고민을 글로 풀어내는 것. 그 역시 내 안의 수많은 상념들과의 소통, 표현들과의 소통의 결과물이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치열하게 사유하지 않으면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쉽지 않다. 다들 글쓰기 과제하는데 대여섯 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토로했다. 고되지만 알고 보면 소중한 시간. 당장 보이는 결과는 초라하고 미진할지라도 그 땀은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가는 것. 소통의 말을 찾아 헤매는 것은 나의 잠재성을 발명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글쓰기 강좌 동료들과 정드는 중이다. 결석이 잦은 20대 친구들이 미워야하는데 예쁘다. 험한 세상에 내던져져서 꿋꿋이 살 궁리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잘해주고 싶고 도움을 주고 싶다. 마음만 앞선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 연애를 시작한 경우가 아니라면 강좌에 빠지지 말라고 얘기하고 다독일 뿐이다. 글 잘 쓰는 법과 삶 잘 사는 법이 다르지 않다고 세뇌시킨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내 삶을 바꾸는 것이 훨씬 빠르며 내 삶을 바꾸기에 글쓰기는 좋은 수단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글쓰기를 통한 삶의 실험 7주차. 다섯 시간을 의연히 수업에 참여하는 친구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문장.
“우리는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나간다. 우리는 결국에 웃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웃으면서 시작하자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