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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과거로 도약해 미래를 구원하라


삼주 전 즈음이다. 4차시 강의안 쓰던 날. ‘글감의 4가지범주의 사례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 인생의 핫이슈 서모군을 활용하기로 했다. 옛날 기사를 검색했다. 8집 앨범을 발표했을 때, 서태지 신보가 나왔다는 스트레이트 기사는- 화제형, 8집 장르는 네이쳐파운드이며 곡의 메시지와 녹음 기법 등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면- 정보형, 서태지는 이번 앨범에도 역시 철저한 자기관리와 혹독한 맹연습 쉽게 타협하지 않는 장인정신으로 완성도 높은 음반을 선보였다고 쓰면- 감동형, 서태지가 컴백하면 평론가도 컴백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 앨범도 평가가 엇갈린다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소개하면- 논란형 기사이다.

아니, 어쩜 이리도 글감의 범주가 사례별로 똑 떨어지는지, 기사원문 붙여넣기를 해가며 풀어쓰는데 콧노래가 절로 났다. 수업시간에 수줍음을 무릅쓰고 나는 서태지 팬이다커밍아웃을 하고는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며... 이혼-결혼 기사가 빵! 터졌다. 연예인 스캔들이 꼭 결혼-이혼 기사 순으로 나와야 한다는 통념이 산산이 부서지던 순간. 나는 얼결에 외쳤다. ‘역시 태지는 주류질서의 전복자야. 우월한 내 남자같으니라구.' 근데 갈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슬픔과 회한, 허무와 동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분단위로 기사가 쏟아졌고 나는 친히 광클릭으로 독파했다. 그런데 기사들이 하나 같이 서태지의 과거를 예언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점치다니.

서태지 역사의 재구성을 목도하면서 헤겔과 벤야민의 시간관념이 떠올랐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이념이 자기완성을 위해 전개하는 하나의 스토리'로 이해했다. 이를 테면 역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발전해가고 서양은 동양이 이르러야할 목적지라는 생각 등등,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인 인식 틀이 헤겔의 시간관을 따른 것이다. 이를 벤야민은 비판한다. “근대 역사철학은 역사를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순간들은 과장되었고, 어떤 순간들은 은폐되었으며, 어떤 순간들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연속적이며 발전적이지 않다. 결코 하나의 연쇄를 이루지 않는다. 순간들 단절들만 있다. 과거가 현재에 선택된 과거라면, 묻혀버린 미지의 과거는 점치기가 가능한 거다.

태지가 아니 떠오를 수가 없는 대목이다. 문화대통령, 천재뮤지션, 완벽주의자 등 서태지를 하나의 잘 짜인 신화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숱한 과장’ ‘왜곡’ ‘은폐가 있었는가. 개인이든 국가이든 존재는 복합구성물이고 고정불변체가 아니라 매 순간 재구성된다. 서태지의 역사, 대한민국의 역사. 모든 역사는 현재 상태의 욕망과 힘들에 의해 승인되고 편집된 과거. 그래서 니체 역시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역사화 되지 못했던 무수한 비역사적 순간들의 발굴자! 니체는 억압된 과거의 순간들을 새로운 현재를 위해 동참시키려 했다. 과거의 무수한 순간들을 살려내고 해방시키는 그 실천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마침 5차시 수업이 과거-되살림 프로젝트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었다. 이 책을 읽은 후, 서문에 나온 대로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을 써오라고 했다. 순대국밥의 순대처럼 떠다닌 날, 손녀에게 극진했던 할머니 사랑, 삼수생의 천덕꾸러기 같던 하루, 자신을 탕진하지 못하고 내일을 위해 늘 무언가 남겨둔 여행자의 소회, 인생을 배운 야구의 추억, 여름날 짧은 연애 등 다양한 과거사가 쏟아졌다 

수업시간. 그간 내 삶에서 역사화 되지 못한 무수한 순간들을 발굴하는 일의 어려움과 당혹감을 이구동성으로 토로했다. 정연 씨는 막상 글을 쓰려니 과거 추억이나 쓸 만한 내용이 생각나는 게 없었다며 과거 기억을 생생히 간직한 김연수가 부럽다고 말했다. 아눈 씨는 두 번 째 남자친구와의 사랑을 허진호의 영화처럼 잔잔히 글로 써내며 남다른 감회를 터놓았다. “그 사람은 제 인생에서 없던 사람이거든요. 누구에게 얘기한 적 없고.. 세 번째 남자친구는 자기가 두 번째인 줄 알아요.(웃음) 저도 잊고 지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까 신기하게 생각이 하나씩 하나씩 나더라고요.”  

김연수가 남달리 성능 좋은 기억장치를 가졌기 때문에 <청춘의 문장들>을 쓸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기억할 것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 같은 기억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며 글로 쓰다 보니 청춘이 통째로 부활한 것이다. 김연수는 지난날의 가난, 사랑, 음악, 비루함, 고생, 친구, 봄날, 방황 등 모든 추억과 아픔을 자산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는 말처럼 스스로 구원받았고 완전히 소진되고 나사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통해 자기를 긍정했다. 김연수의 행복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도약하는 순간에 찾아왔다.

수업 후 명운씨가 진솔한 후기를 남겼다. 글쓰기가 스트레스인데 그 이유는 "태어나서 글을 이렇게 정기적으로 써 본적이 없어서이기보다는 나의 현재 상태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어서 괴롭다". 하지만 글쓰기가 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다른 삶을 사는 방편이 되기를 바라며, 매일 써보려 한다며 의지를 드러냈다. 존재감염이 이뤄진 모양이다. 좋은 사례다. 우리가 <청춘의 문장들>에서 배워야할 것은 김연수처럼 미려한 문장을 쓰는 법,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진리를 끌어내는 법이라기보다 과거를 살려내고 해방시키는 실천이 아닐까. “우리로 하여금 현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으로서의 글쓰기. "그러므로 글 쓸 때 나는 가장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지복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