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노동을 떠올리면 눈물이 찬다. 발원지는 동대문이다. 2005년, 남편의 투자실패로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살림을 줄였다. 나의 형편을 딱하게 여긴 시숙부가 어떻게든 돕고 싶어 했다. 나를 부르시더니 당신이 운영하는 섬유회사의 정규직 자리를 권하셨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아이들이 학교 끝나서 돌아오면 집에 있는 엄마이고 싶다”며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하는 파트타이머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시숙부는 바로 아르바이트자리를 만들어주셨다. 동대문종합시장 매장에서 매일 전표를 가져다가 계산하고 다음날 다시 가져오는 일이다. 집에서 동대문까지 왕복 2시간, 업무처리에 1시간 정도 소요됐다. 월급으로 100만원을 받았다. 후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지게꾼 그즈음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원고 교정을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동대문을 다녔다. 1호선 동대문역의 눅진한 공기가 껌처럼 들러붙던 여름날, 동대문종합시장의 비좁은 계단을 오를 때면 늘 지게꾼과 마주쳐서 벽 쪽으로 납짝하게 몸을 붙여야했다. 그들은 두루마리 원단을 가득 싣고서 지팡이를 짚고 뒤뚱뒤뚱 잰걸음을 옮겼다. 서울 도심에 아직도 지게꾼이 일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밖에도 ‘시장통’을 오가며 식당에서 밥을 나르는 아저씨,보험상품 전단을 돌리는 세일즈맨,음료수 카트를 밀고 다니는 아주머니 등 ‘몸뚱이’를 밑천으로 일하는 이들과 집중적으로 마주쳤다. 동병상련이랄까. 나도 먹고 살기 위한 노동전선에 뛰어들어서인지 그들이 남 같지 않았다. 노동은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으며 그저 뼈 빠지는 일이라는 것, 삼시 세끼 누군가의 입에 밥덩이를 넣기 위한 악전고투라는 사실을, 그들과 날마다 옷깃을 스치면서 깨달았다.
사보일이 점점 많아졌다. 투잡이 힘에 부쳤다. 하나를 그만두어야했다. 적성에 따라 글 쓰는 일을 택하자니 내가 배신자 같았다. 시숙부의 호의, 무엇보다 지게꾼의 땀내가 맘에 걸렸다. 송구했다. 그들은 노동을 대상화시켜 ‘사유’하지 않는다. 그저 일한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 페달 돌리듯이 쉬지 않고 육신을 굴려서 생존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노동을 멀뚱이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하는 나의 태도가 왠지 사치 같았다. 고민 끝에 시숙부에게 일을 그만둔다고 편지를 썼다. 사보일이 시장일보다 더 나은 직업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꼭 원하는 일이라서 선택했노라고, 그간 시장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고 그 점이 감사했다고 주저리주저리 퇴사의 변을 늘어놓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때 기분으로는 ‘나는 일생의 몫을 다 경험한’ 사람 같았다.
구름 <해피포터>의 저자 J.K롤링이 그랬단다. ‘실패가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주었다. 실패한 덕에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쏟기 시작했다’고. 어렴풋이 공감했다.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 것이 아니었다’는 기형도의 시구처럼 어느 날 홀로 없어진 돈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거다. 그것을 인식하자 삶이 한결 쉬워졌다. 돈보다 나, 나중보다 지금에 집중했다. "사회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시간을 축소했다" 시숙부의 정규직 제안이 아닌 비정규 알바를 택했고, 알바의 안정적 수입보다 작가의 미미한 고료를 택했고, 사보업계의 편안한 돈벌이보다 연구실의 배고픈 인문학을 택했다. 나는 노동을 거부하지 않았다. 더 일하면 더 행복해진다는 노동의 환상을 거부할 뿐.
오이 <노동을 거부하라>를 연구실에서 처음 읽었을 때, 자유로운 노예노동이 아닌 의미충만한 활동을 넓혀야 한다는 식의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발끈했다.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는 고학력집단이다. 금권자본은 없지만 학벌자본이 막강한 대한민국 상위 3%가 모였다. 그들은 호기롭게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지 몰라도 “나의 경력은 출생뿐”인 기층 민중에게는 얼토당토않은 배부른 소리 아닌가 싶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지만 현실을 배반하는 이론으로 들렸다. 그렇게 살고 싶은 열망이 강한 만큼 반발이 컸던 것 같다. 그 땐 그랬다. 3년 만에 글쓰기 수업에서 동료들과 같이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
“아버지는 오늘도 새벽에 나가셨다. 도매와 소매를 함께 하시는 요즘 아버지의 노동은 365일 쉼이 없다. 노동이 삶이 되어버린 아버지 삶이 눈물겹다. 노동을 거부하란 말은 내게 달콤하다. 하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는 순간, 그 말은 불편하다. 아버지의 삶을 통으로 삼켜버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엄친딸로 콧대가 높던 정민씨. 부잣집 아이의 정체성을 갖고 싶어서 ‘오이장사 아버지’를 거부하던 철없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노동을 거부하란 말이 불편한 나이가 됐다. 정민씨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아버지의 노동에 숙연해진다며 글을 맺었다.
용돈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가치평가는 온당한가. 이 질문은 옥기샘 글로 이어졌다. 중학생 때부터 용돈을 절약해서 옷을 사고 여행을 가는 아들이야기. “대학에 가서도 아이는 공강 시간에 학교에서 주차 알바를 하고 방학이 되면 짬짬이 건축현장에서 노가다를 하였다.” 웃어른 공경하고 근검절약으로 다져진 건실한 청년이다. 헌데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그러하듯이 노동은 아들을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스스로를 뉴라이트라고 칭하는 기독교 우익청년이다.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인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는 헷갈린다. 생활력이 강한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행여나 돈을 최고로 여기고 욕망을 포기하며 각박하게 살까봐 염려스럽다. 그래서 글의 제목이 ‘엄마의 이상한 수식(계산법)’이다.
니체는 노동에, 정확히 말하면 노동의 신성함이란 수식에 반대한다.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간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또한 산업화 이후 현대 사회는 ‘노동의 찬양’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인 삶의 충동들을 길들이며 노예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니체가 볼 때 노동은 인간의 ‘딴 짓 욕망’을 거세하고 성실한 일꾼으로 만드는 내면의 경찰이다.
떨이 니체만큼 신랄한 논리를 전개한 한준씨. ‘저임금 노동’을 거부하는 20대다. “TV에 나오는 알바해서 등록금 벌고 열심히 일하는 건실한 청년이미지는 허상”이라며 “자신의 노동력과 교환한 최저임금 4200원에 수치심을 느껴야한다”고 일갈한다. 자기 노동력을 최저임금에 파는 행위는 고귀한 노동과는 거리가 있으며 단지 돈이 필요하기에 노동력을 떨이로 팔아버린다는 것. 한준씨는 “현재 우리가 가진 생각이 앞으로의 노동, 임금에 대한 판도를 결정할 것”이라며 나 홀로 파업 중이라고 밝혔다. 한준씨의 글에 대해 동료들은 “생각한대로 글을 쓰는 용자”라며 부러움을 표했다.
일손 놓은 20대 두 명 추가요! 병채씨는 스콧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벤치마킹했다. “생계를 위해 4시간을 일하고, 영혼을 위해 4시간을 읽고 쓰는데 쓰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기 위해 4시간을 들이는 완벽한 하루”대로 살아본 것. 허나 다들 직장에 매여 있으니 지속적으로 매일 4시간씩 교분을 나눌 친구가 없었고, 결국 삶의 실험을 중단했다고 말해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한 것도 없이 싫은 것만 잔뜩 쌓아둔 채 대학 4학년”을 맞은 취업준비생 솔이 씨.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상품대신 나를 변화 발전시키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고 싶다는 것.
잡목 치열했던 수업시간. ‘노동은 삶의 필연’이라는 전제를 뒤집어 사유하기는 물구나무 선 채 토론하기만큼 에너지 소모가 컸다. 다들 얼굴이 벌겋다. 나는 벌집 쑤신 것처럼 다음 날까지 머리가 왱왱 거렸다. 지친 영혼을 달래려 펴든 책. 어느 중국 철학자가 말한 <쓰임새의 고통>이란 대목이 눈에 든다. ‘숲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다. 제일 굵은 나무로부터는 배를 만들기 위한 대들보감이 베어졌고, 좀 덜 굵은 그런 대로 쓸 만한 나무로부터는 상자 뚜껑이나 관이 만들어졌으며, 가장 가는 나무로부터는 회초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잘못 자란 구부러진 나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들 잡목은 쓰임새의 고통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봄날 쓰임새의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잡목들에게 희망을’ 이란 부제를 달아줘야 할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지상명령이 내려진 시대. 한 사람의 쓰임새는 자본시장에서의 교환가치를 뜻한다. 상품성에 따라 연봉이 매겨진다. 이 세상은 더 큰 쓸모를 갖추기 위한 경쟁의 아수라장이다. 5월 볕 좋은 토요일, 남산골에서는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장 넘기는 소리 요란했다. 한준씨는 ‘고귀한 노동’을 외치고 솔이씨는 ‘비생산적 노동’을 꿈꾸고 병채씨는 ‘조화로운 삶’을 말한다. "노동과 함께 몰락하지 않기" 상품가치가 아닌 존재가치의 싹을 틔우려는 안간힘이다. 구부러져서 아픔을 모면한 청춘. 삐뚤어져서 아름다운 청춘들의 낭랑한 울림 속에,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