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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낙화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시집 <오을의 내 몫은 우수한짐>, 문학사상사


공포의 토요일. 안 그래도 울렁증이 가라앉질 않고 입까지 두 군데 헐어서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어찌나 무섭게 내리는지. 진심 추웠다. 수업 중에 핸드폰이 연달아 울린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보니까 도착한 메시지가 7.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줄 문자다. ‘태지가 닷컴에 글 올렸어사실 별 기대는 안 했다. 무슨 말을 할까. 태지가 열흘 만에 입장을 밝힐 때는 아마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했을 것이라 여겼고, 나중에 봤을 때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 마음이 안 좋았다. 자기애에 빠진 글. 전형적인 남자의 언어였다. 제 아무리 스토커든 미친 여자이든 단 한 줄이라도 배려해주었음 좋을 텐데. 전 남편은 전 부인에게 매정하고 서늘했다.

그것이 괴롭다. 언제나 내가 태지에게 실망하는 지점은 하나다. 뭔가 움켜쥐고 자기 것을 지키려 할 때, 속세에 살면서 흙탕물은 단 한 방울도 안 튀기려 할 때, 아름답게 몰락하는 법을 모를 때. 그가 보수적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 이외의 것들, 자신의 존재구성에 함께 한 것들을 어느 순간 대상화시켜 버리는 태도에 화가 난다. 2004, 2008, 2011. 세 번째 위기다. 이번 일을 두고, 도대체 여자 있었던 게 뭐가 문제냐고 하는 말들. 나의 번뇌를 사생활 승인 문제로 단순화시켜버리는 논리다. 마치 뮤지션이 음악으로 말해야지 정치적인 제스처를 바라지 말라는 충고와 비슷한 맥락이다. 초라한 이기심의 재생산. 나이가 들수록 자기와 팬들의 세계로 수렴하는 그를 보는 일이 안타깝다.  

그러니까 나의 괴로움의 근원은, 미련스러운 집착이다. 태지의 사려 깊음과 발랄한 감수성과 진취적인 가치관에서 영감과 자극을 받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 한계를 충분히 상정했다고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작고 여린 태지.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 연민 쩔었다. 나 스스로 만든 거울방에 갇혀 스스로 불어난 잉여감정에 매달려 살았다. 모든 사랑은 나르시시즘임을 인정한다. 내가 어리석어 서태지의 공적인 삶. 음악만 분리해서 사랑하지 못했다. 교보문고에서 빌딩부자들이란 책을 보니까 그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멀리 밀려났다. 새로운 감정이다. 이번 일을 통해 배운다. 나를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하는 법은 얼마나 어려운 삶의 기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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