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벚꽃 핀 술잔 / 함성호  (7) 2011.06.06
영회(咏懷) / 오장환  (9) 2011.06.03
산 / 김종삼  (10) 2011.05.06
낙화 / 이형기  (28) 2011.05.02
곡강이수 / 두보  (9) 201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