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독의 날. 글쓰기수업에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함께 읽었다. 나는 아침부터 시에 대한 예를 갖춘답시고 분홍 카디건으로 꽃단장을 마쳤다. 간간이 빗발이 흩날린다. 키작은 하늘, 맞춤한 날씨.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시를 낭독하고, 왜 좋은지, 어떤 시구가 끌리는지 감상을 이야기했다. 한 명 한 명 시를 고르고 읽을 때마다 문학과지성사 밤색 테두리에 노란 표지의 시집을 단체로 들었다 놓았다하는데, 앞자리에서 보니까 꼭 카드섹션 같았다. 은행잎이 우르르 떨어지다가 다시 화르르 피어나는 느낌도 들었다. 눈과 귀가 호강했다. 시의 ‘들음’ 그 수동성의 상태가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낭독의 서정이 한없이 좋았다. 감상 말하기의 첫마디는 모두 같았다. “이런 해석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아, 순정한 마음들이여. 나는 호소하다시피 고한다. 시 읽기는 정답 없음-의미생성이 본질입니다. 국어시간에 배운 무거운 것들이랑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머뭇거림은 잠시 뿐. 말문이 터졌다. 저마다의 자기체험과 당대정황에 접목시켜 시를 술술 풀어냈다. 이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껌뻑이니 저 사람이 또 다른 추억을 찾아내어 말을 잇고. 강의실 안에서 팔랑팔랑 나비효과가 일어났다. 기억의 모방인가. 대리고백인가. 서로서로 섞이면서 감염됐다. 삶의 비극성이 한숨처럼 삐져나오던 얇은 시집. 누구 말대로 이름까지 '기형'도. 제목은 왜 하필 '입 속의 검은 잎'이람. 표제는 김현이 붙인 건데. 기형도는 제목으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염두에 두었다. 거리의 시인은 버스 정류장을 사랑했다. 검은 잎이든 정거장이든 건조하고 암울하고 딱딱하고 불안하긴 마찬가지. 의미의 배회와 탐사 끝에 의미의 배반에 이르렀는가. 시편들이 묵직하다가 가붓해졌다. 일군의 기형도시불편호소세력이 갈수록 표정이 순해진다. 밝아진다. "읽히네요." 미소짓는다. 이 장면을 본 기형도는 이렇게 말했으리.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포도밭묘지2)
시술벗의 권리를 사들이다. 큰방에서 시를 읽고 주차장에서 벗의 노래를 듣고 해방촌오거리에서 술을 벗했다. 화투패마냥 모여 버스정류장에서 견딘다. 더 멀리 흘러가기 위해. 홍대 산울림소극장 건너편 회색 건물 지하.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원더풀투나잇. 밤. 비닐봉지처럼 입을 벌린 까만 밤. 기형도의 밤,은 존재와 사물을 은폐하기보다 그것들의 깊이와 새로움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빛깔. 하얀 어둠 쏘인다. 기형도의 시를 읽고 나서 나는 보네. 길가에 세워진 빈 오토바이를 시라고 한다. 술집주인의 보글 파마머리와 죽은 맨드라미같은 빨간 스웨터를 시라고 한다. 남의 테이블에서 가져온 먹다 남은 안주를 시라고 한다. 입 속의 검은 잎이 제일 어렵다고 설명해달라는 그를 시라고 한다. 오일팔이야기라는 의미의 압핀을 꽂아두지 않기위해 못들은 척 하는 나를 시라고 한다. 시를 모르는 우리를 시라고 한다. 재즈와 재즈사이 끼어든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시라고 한다. 목소리보다 큰 스피커를 시라고 한다. 질나쁜 성냥처럼 꺼져버리는 수다. 밤이 깊어 얼어붙은 도시, 새벽 3시 오지 않는 택시를 시라고 한다. 가엾은 내 시들 빈차에 갇혔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