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단장 컨셉에 맞추느라 신발장을 지키던 7센티 정통 하이힐 신고 외출했다가 아주 고생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벌겋게 달궈진 발을 따순 물로 씻고 로션을 발랐다. 왠지 뼈랑 힘줄이 툭 튀어나온 것 같아서 발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구겨진 발톱을 폈다. 불과 작년까지 멀쩡히 신어놓고서, 저 신발 당장 버릴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 꼴을 아들이 보더니 “그러게 왜 하이힐은 신었어요” 한다. 그 뉘앙스가 꼭 전원일기 김회장이 팔순 노모 나무라는 말투였다. 만으로 14세인 아들이 만으로 아직은 30대인 엄마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결정타를 날린다. “엄마는 결혼도 했으면서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요~” 순간 내 표정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아들은 아차 싶었는지 하이힐은 아가씨들이 신는 거 아니냐면서 과학선생님이 발 건강에 해롭다고 했다는 둥 횡설수설 둘러댄다. 그럼 내가 이 나이에 킬힐은 고사하고 효도신발 신으리? 지가 사주던가! (너 돈은 있냐) 하려다가 말았다.
눈에 낀 잡티처럼 나이가 자꾸 거슬린다. 별일이다. 이력서 쓸 일도 없었으니 딱히 그동안은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누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그제야 손꼽아 보고 대답했다. 그런데 신체가 신호를 보낸다. 생리주기가 점점 빨라졌다. 주위에 그 얘길 하면 ‘벌써 마흔이니?’ 놀란다. 선배들 왈 40살부터 생리불순이 시작된단다. 발도 늙고 자궁도 늙는다. 머리는 기본이다. 미장원에서는 뒷머리 속에 흰머리가 뭉쳐있다고 알려줬다. 한참 수다에 필 받는데 영화제목, 사람이름 등등 고유명사가 목 끝에 걸려서 말문 막히기 일쑤다. 신체부위별로 돌아가며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경고등을 깜빡인다. 그러니 아아, 어찌 잊으랴. 삶을 교란시키는 그 바이러스 같은 숫자를.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큰 소리 치는 사람이 가장 사랑을 갈망하는 것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자의 뇌리엔 나이가 화인처럼 찍혀있음을 알았다. 신체가 괜히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니겠지. 인생 후반전 접어들었으니 정신 바짝 차리라는 호루라기 소리일 거다.
공자의 나이도식에 따르자면 사십 줄은 안정권이다. 미혹되지 않음. 그런데 불혹이란 말이 쓰인 것은 유혹이 그만큼 많아서란다. 언론인 김선주도 그랬다. 주위의 남자들이 노선수정 입장변경을 가장 많이 하는 나이가 마흔이더라고. 뭐, 미래는 불안하고 육신은 외로운 가부장감수성 이해한다. 노화론, 변절론이 다가 아니다. 사십대 황금기론도 물론 있다. 나의 국어선생님은 제자의 사십대 진입을 축하하며 지나놓고 보니 삼십대는 어설펐고 사십대가 제일 왕성했다며 향후 십년을 잘 보내라고 격려하셨다. 박완서도 마흔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알곡같은 글을 생산했다. 인생후반전 내내 풍작이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 설계한 건축가 류춘수는 심지어 사십대를 두번 산다고 했다. “최소한 예순 살까지는 한 눈 팔지 말고 초지일관 가라. 인생에서 한번쯤 방향전환이 필요한 나이는 60세다. 나도 4년 전 환갑 되던 해 고민했다. 은퇴할까. 세계여행을 할까. 국사공부를 할까. 그러다가 결심했다. 하던 일 하되, 나이를 깎자! 20년. 마흔 다섯이 됐다. 거짓말처럼 힘이 나더라.”
누군가는 4호선으로 갈아타는 나이. 누군가는 우향우 하는 나이. 누군가는 바닥에 외로움을 뱉는 나이. 누군가는 KTX의 속도로 달리는 나이. 누군가는 의자에서 하이힐 벗어놓고 부은 다리 주무르는 나이. 누군가는 노란선 바깥에서 기우뚱 하는 나이. 누군가는 개찰구에서 서성대는 나이. 서울역 같이 다양한 삶이 오가는 사십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