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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김종삼 / 묵화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시집 <북치는 소년> 민음사



   

긴 하루가 지났다. 단거리 마라톤을 끝낸 것 같다. 다리가 팅팅 부었다. 다시 한 호흡 가다듬는다. 늘 삶이 단조롭기를 소원하나 그러질 못해 말썽이다. 친구가, 나이 사십에 접어들면서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기로 결심했는데도 왜 똑같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니만 내가 그 짝이다. 분명 결심했다. '잘할 수 있는 일만 하자. 한 가지라도 공들여 일하자.' 그리고 종종거리지도 징징거리지도 말고 묵묵히 거뜬히 해내자. 그런데 여전히 부릉부릉 시동소리 요란하다. 이런 삶은 주위에도 민폐다. 나와 접속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이 늘 이렇다. “요새 바쁘지?” 완전 민망하다. 조용히 많은 일을 해내는 인간상을 구축하지 못해서. 인간이란 얼마나 일상의 흐름에 예속적인 존재인가. 습 하나 바꾸기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인식'하지 않고 '확신'만 남발한다.

어제는 후배가 전화해서 “언니 잘 살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로 시작하는 하소연을 한 시간 가량 해댔다. 동조했다. 언제쯤 돼야 사는 게 수월해질까 모르겠다. 그런데도 후배가 나는 인생 고수처럼 보인다고 부러움을 표했다. 그래서 말했다. “낮에 속상한 일 있어서 울었어. 어쩌구 저쩌구...나도 힘든 일 많아. 왜 이러셔!” 후배 푸념이 잦아들었다. 눈물이 한숨을 구원한 둣 보였다.  삶은 선한 의지와 굳은 결심만으로 매끄럽게 살아지지 않는다. 외부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닥치기 마련이다. 상처 주고 사랑 받고. 포기하고 욕망하고. 인생이란 언제나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그런데 또 감정의 결은 매번 새롭다. 그 때마다 느끼고 수용해야지 별 수없다. 무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지 말자. 그게 꼭 좋은 삶은 아니다. 발잔등 부은 오늘 하루를 찬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