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김수영 / 비 '움직이는 비애'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김수영전집1 , 민음사 


 



시골구석에서 사는 아이가 희귀난치병이다. 몇 번 들었어도 이름을 외기 힘든 척수성근위축증. 태어나자마자 사지에 힘이 빠진다. 심폐기능이 약해 호흡이 어렵다. 지역 내 큰 병원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억척스레 아이를 들쳐 업고 상경했다. “그래도 큰 병원 가봤다는 소리는 들어야지 원이 없잖아요.” 이런 얘길 들을 때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투박하고 새까만 문신한 눈썹과 실밥 뜯어진 비즈가 처량하게 매달린 네크라인을 멀뚱멀뚱 훑는다. 수년간 그 먼데서 ‘큰 병원’을 다니며 아이의 숨을 이었다. 없는 사람에게 병원체제로 돌아가는 24시간은 혹독하다. 째깍째깍 초침 따라 병원비가 올라간다. 빈 밭처럼 버려진 집구석에 비가 들이친다. 세끼 먹고 사는 일상성의 유지가 힘들다. 번뇌는 물적이다. 궁핍하면 험해진다. 아픈 애가 있는 가난한 부부는 거칠기 짝이 없다. 아파서 가난하고 가난해서 싸우고 싸워서 다시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