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타고 가는 길.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유리창에 빗방울들이 사선으로 아슬아슬 달라붙어 있다가 점점 미끄러지더니 가차 없이 몰락한다. 고 여리고 투명한 것들의 맹렬한 몸부림의 경연장에 내 얼굴은 희미한 배경으로 설정돼 있었다. 머리를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난줄 몰라봤다. 유리창 안쪽에 간당간당 매달린 나. 빗방울처럼 혼자인 나 또한 언젠가 형체 없이 소멸할 것이다. 잘 죽고 싶다. 별안간 그런 생각이 덮쳤다. 오랜만이다. 친숙한 안건이었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삶의 지형도가 몹시도 위태로운 까닭에 발밑이 늘 불안불안하다. 장례뉴스를 볼 때마다 같이 죽는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보편적 사실의 주기적 환기에 대해 나는 제법 성실히 응하는 편이다. 내가 죽으면, 혹은 여한이 없이 죽기 위해서는, 으로 시작되는 손때 묻은 시나리오가 몇 편 있다.
법정스님 레벨도 아니면서 모든 절차를 간소화한 죽음을 욕심내긴 차마 염치없다. 다만 유소유로 몸살 앓다가 가는 인생이라서 죽을 때만이라도 가볍게 죽고 싶다. 엄마 돌아가시고 영안실에 달려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서류작성이었다. 어떤 남자가 오더니 영안실과 관과 수의는 얼마짜리로 할 건지, 음식 메뉴는 뭐로 할지 그런 걸 표시하라고 했다. 엄마의 죽음 통보가 그랬듯이 느닷없는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 죽어도 그럴까. 난 수의패션에는 관심 없다. 무조건 최저가 매수다. 안구장기기증 후 화장까진 준비완료. 문제는 내가 흘린 것들이다. 나 빼고 웅성웅성 모여서 내 소지품을 들여다보고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물건을 정리하며 내 삶을 해석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서 점포정리 하듯 한 번 씩 정리하고 분양한다. 뒷정리가 필요 없도록 자기정리는 하고 살자 다짐하며.
마지막으로 업장소멸. 이번 생에서 풀고 가야할 중요한 숙제다. 말빚과 원한 감정, 뼈아픈 후회를 남기는 일 없게 하려 한다. 해결 가능한 것들은 즉각 실천한다. 아주 사소하게는 신세진 사람에게 밥 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그러고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감정은 어찌하지 못한다. 친구에게 의논했더니 너는 살면서 물음표로 남겨둔 게 그것밖에 없니, 묻는다. 노력했다고 답했다. 그러려고 공부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웠던 일은 결국 내가 변하고 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힘이 관대해져야 해결되는 문제였다. 더러는 가슴 바닥에 덮어두면 그 위로 눈비가 내리고 썩어서 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얄궂게도 플라스틱처럼 500년 걸려도 분해되지 않을 것 같은 응어리도 있는 거다.
친구는 전생의 업보로 자라난 내 안의 독이라고 했다. 큰 맥락에서 수긍했다. 나라는 존재는 지난 수천만년 과거의 역사가 축약된 몸일 것이므로, 나의 오감 형성은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노동(맑스)일 것이므로. 니체도 내 자신의 과오를 다리 삼아 걷게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를 더 들여다보고 더 심연을 파고 들어가서 내가 마주해야하는 어둠, 내 손으로 풀어야하는 매듭이 있을 것이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빗방울 따라 내동댕이쳐진 몸을 일으킨다. 살어라. 살어라........하신다. 맴돈다. 죽음에 대한 숙고는 삶에 대한 성찰로 종결된다. '죽음의 긍정이 절대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죽음을 찬미하는 의미에서 긍정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지요.’ (다나 해러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