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열흘 만이건만 그새 거리에는 봄기운이 파다했다. 햇살이 눈부시고 바람이 간지럽고 피로에 눌린 탓에 원래 크지도 않은 눈이, 마치 열리다 만 셔터처럼 반쯤밖에 안 떠졌다. 그 작은 눈으로 노선 번호를 잘 알아보고 버스를 탔는데 그만 내리는 곳을 두 정거장이나 놓치고 말았다. 허둥지둥 내려 건너편에서 다시 버스를 집어타고 거슬러 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좁혀오는 버스 문틈사이로 겨우 발을 빼냈다. 내 손바닥 같은 활동구역에서 이렇게 해맬 줄이야. 아마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전지훈련 같았던 스위스여행에 익숙해진 몸의 소행이리라.
길을 취재하러 가는 길. 이번 테마는 경복궁 3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직진하면 나오는 통인시장 부근 한옥길이었다. 시내에서 약속을 잡을 때 종종 들러 장을 보거나 근처에서 차를 마시던 동네이며, 서울을 여행하는 친구가 있다면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 냄새 나는 길이다. 조금 서둘러 출발해 길담서원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신간을 둘러봤다. 막간을 이용해 정아언니와 접선을 하고 수녀님을 만나 시장으로 향했다. 골목만 돌아서면 동네 이름이 바뀌는 효자동, 누하동, 누상동, 통인동, 옥인동 등 경복궁 서쪽에 있다하여 지어진 ‘서촌’ 일대를 두세 시간 발로 누볐다. (사진:한겨레)
취재를 마치고 수녀님이 아는 예쁜 카페가 있다하여 경복궁 방향으로 길을 건넜다. 여기는 아니지만 돌아가면 거기가 나올 것 같다며 들어선 골목길. 안으로 깊숙이 굽이쳐 들어가자 떡하니 남의 집 대문이 나온다. 막다른 길이다. 다시 돌아 나오는데 골목길이 또 다른 샛길로 안내한다. 외관만으로도 메인쉐프에게 신뢰가 가는 근사한 파스타 집, 벽면을 유리로 내서 멋진 작품을 걸어놓은 갤러리 등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개성 넘치는 감각적인 한옥들이 듬성듬성 있으니 한 블록 지나가기가 하세월이다.
발밑에 감탄사를 쏟으며 걷다 쉬기를 반복하다가 머무른 한옥집의 벽에 새겨진 이름. 류가헌. 노래가 흐르는 집. 옛사랑 이름의 문패라도 발견한 것처럼 나는 깜짝 놀랐다. 작년 가을, 사진하는 선배가 경복궁 근처 한옥을 구해서 아담한 갤러리 겸 작업실을 열었는데 그곳 이름이 류가헌이었다. 몇 달 후 그 선배가 ‘귀인’을 만나 큰 한옥을 얻어 확장 이전한다는 얘길 전해 들었던 참이다. 여기가 거긴가 싶어 무작정 대문을 콩콩 두드렸다. “누구세요.” 담장 넘어 번지는 친숙한 음성. 그리고 나무색 문 틈 사이로 좁다랗게 보이는 낯익은 얼굴. 내가 기분에 따라 오빠라고도 부르고 형부라고도 부르는 류가헌의 그 선배였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들렸어요.” 오픈 식에서 얼굴 보고 몇 달만인데, 두서없는 말을 던지고는 하늘을 담은 집 마당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선배는 3월 개관을 앞두고 니스칠에 한참이었다. 11월부터 직접 인테리어하는 중이라 했다. 한옥의 정취를 보존하면서 현대적 감각이 가해진 격조 높은 공간이 열렸다. 수녀님들이 한눈에 반했다며 좋아라하신다. 검정 고무신 신은 어시스턴트 친구가 내준 핸드드립 커피와 통인시장에서 인심 좋은 아주머니께 얻은 콩 박힌 백설기를 꺼내 놓고 우리는 사진이야기, 집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었다. 평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카메라 들고 나가는 선배는 에베레스트 등반대원으로도 활약하는 에너자이저이다. 가난한 사진가로 자유하며 살다보니 ‘쌀독에 쌀이 떨어져’ 놀이터를 마련했단다. 가난한 사진가들에게 전시공간을 대여해주는 일을 할 예정이라며 류가헌의 시놉시스를 공개했다. 듣는 내내 가슴 설렜다.
아마도 오픈식에 갔겠지만 미리 들러 공간의 탄생을 지켜보고 주인장과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류가헌을 나오며 수녀님들은 내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며 고맙다 하셨지만 나는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이라며 앞장 서 걸었던 수녀님과 골목길에 감사드렸다.
스위스로 떠난 날. 서울에서 제네바 직항노선이 없어 갈아타야하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전광판에 제네바행 노선이 안 보였다. 캔슬이라는 표시는커녕 안내방송도 없었다. 황당했고 당황했다. 12시간 비행 끝에 오밤중에 만리타국에 미아처럼 떨어져버린 신세라니. 우리 셋 중에 비교적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아들이 나섰다. 인포메이션 부스와 길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가며 무거운 짐가방 끌고 공항을 누비며 상황을 파악하고 수습했다. 폭설로 노선이 취소됐단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다음날 비행기표와 호텔숙박권과 식사권을 받아 호텔로 찾아가고 방을 배정받았다. 딸의 로망이던 하얀 침대시트와 은은한 스탠드가 곳곳에 켜진 방에서 자고 레스토랑에서 내 돈 주고는 감히 못 먹을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사진: 괴물을 좋아하는 아이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덜하다) 여행 첫날부터 삐끗해버린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는 입도 뻥긋 못하고 아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이들 데리고 폼 나게 ‘배낭여행’을 하려던 나는 졸지에 아들 손에 끌려 다니는 ‘효도관광’ 신세가 돼버렸다. 걱정과 긴장으로 좌불안석인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초보 여행자에게 닥친 '잔인한 우연'을 유유히 즐겼다. 밤에 잠도 안자고 TV까지 틀어놓고 시청했다. 독일어도 모르면서 무슨 재미로 보느냐 했더니 우리나라의 일박이일 같은 프로그램이라며 키득키득 웃기까지 한다. 애들은 "짱 좋다"를 연발하며, 비록 비행기는 결항됐지만 덕분에 하룻밤 좋은 호텔에서 먹고 자게 됐다며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나도 영광의 밤이라고 위안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곳은 니체와 맑스의 나라 독일이었으므로.
서울 올 때도 헛걸음을 한 번 더했다. 루프트한자 파업으로 운행이 취소돼 버린 것이다. 한 나절 후에야 대체 항공편인 스위스항공으로 취리히와 푸랑크푸르트를 들러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서울로 왔다. 첨엔 좀 낙담했지만 스위스항공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고급 항공사이고 아시아나항공은 심지어 ‘우리의 날개’다. 애들에게 작은 인형도 주고 초콜릿도 주고 생수도 통째로 주는 등 서비스가 달랐다. 돌아가는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빠르고 편하게 호사를 누리며 왔다. 이번 여행의 ‘입출국 대소동’을 두고 아이들은 “비행기 놓치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다”고 말하고, 연장전으로 서울에 오자마자 골목길 헤매기까지 완수한 나는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고 정리한다. 길에서 배웠다. 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는 ‘잘못된 일’이 꾸역꾸역 살아감으로써 배치가 달라지면 더러는 ‘좋은 일’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