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 같은 이 300만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스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 장석남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사
작년 일이다. 책을 대신 써주기로 했다. 에세이를 내고 싶어하는 사람과 인연이 닿았다. 흔히 말하는 대필작가의 노릇을 처음 하게 됐다. 원고료를 협상할 때, 비록 대필작가는 초보지만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원하는 금액을 말했다. 아니면 말고의 심정으로. 하기로 했다. 출판사 직원에게 요즘 제일 잘나가는 대필작가의 이름을 물어서 그 사람이 작업한 책을 샀다. 단숨에 읽었다. 이정도로 쓰면 되겠구나. 작업을 시작했다. 몇 번에 걸쳐 살아온 얘기, 사는 얘기, 하고싶은 얘기를 듣고 썼다. 아주 긴 인터뷰 같은 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세 번에 나눠 원고료를 받았다. 쪼개진 목돈이다. 그래도 늘 하던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공짜돈 같았다. 뭔가 유의미하게 쓰고 싶었다.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대로라면 전세자금에 보태 써야하는데 그러기 싫었다. 나한테는 목돈이지만 고공상승하는 전셋값으로는 턱도 없는 일. 어차피 기별도 안 간다.
궁상맞게 말고 근사하게 쓰자. 이전의 삶에서 맛보지 못한 다른 향락을 창출하는 쓰임이 무얼까.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다. 라식수술을 할까. 여행을 갈까. 아니, 라식수술을 하고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았다. 스위스에 가있는 은주언니에게 가기로 했다. 지난 12월에 제네바행 티켓을 끊었다. 12일에 떠나서 23일에 돌아온다. 다행히 시댁에서 신정을 지냈다. 라식수술은. 고민하다가 이전에 안구기증 해놓은게 생각나서 혹시 몰라 알아봤더니 라식수술한 눈은 안구기증 못한다고 했다. 미련없이 포기했다. 남편은 회사일 때문에 못 가고, 아들과 딸 데리고 비행기를 탔다. 해마다 명절즈음 '연휴를 맞아 해외로 여행가는 인파'가 뉴스에 나오면, 난 언제 저기 껴보나 부러웠는데 이번에 소원풀었다. 여기는 제네바의 조용한 동네. 거스르는 시간의 흐름에 적응못하고 새벽 5시부터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다. 오늘 저녁, 파리 오를공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