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품에서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삼사십대 남녀 다섯이 인사동에서 모였다. 전시를 끝낸 지인의 뒤풀이 자리다. 조곤조곤 수다 떨며 와인 한잔 마시는데 마흔 지난 남자가 물었다. “내 나이에 사랑을 하는 게 좋은 거야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여자들이 개구리합창처럼 답했다. “당근 하는 게 좋지.” 능력 있음 해보라는 식이었다. 남자는 이내 도리질이다. 희생이 너무 커서 싫단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아프게 하기가 미안하다고, 또 사랑해봐야 몸 섞고 나면 별거 없다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중얼 결론 후 마침표를 찍는다. 대체 왜 물어봤을까. 아니, 답이 뻔해서 물어봤을 것이다. 오로지 물음의 행위로써만 반짝 사랑의 감각이 살아나니까. 예정에 없던 나이를 갱신하며 혼란스럽고 무료하겠지. 그럴 때마다 머리 위로 굴러 떨어지는 사랑에 관한 자문자답의 돌을 굴릴 테고.
감정의 저울질과 엄중한 자제가 가능하면 그게 사랑일까 토론하는 동안 사례발표. 스모키 화장이 잘 어울리는 서른의 큐레이터는 얼마 전 유부남에게 절절한 사랑고백 편지를 받았단다. 몇 통 오더란다. 그런데 일주일 후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이별편지가 당도했다고 한다. 그분이 안쓰러웠다는 연민의 말과 함께 그녀의 새초롬한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희미한 웃음도 섞여. 베스트극장 ‘예고편’에 그쳤다. 그분, 초기감기도 아닌데 일주일 만에 똑 떨어진 걸까. 어째 좀 박한 느낌이다. 적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동안은 품을 일이지. 살면서 연애편지 쓰고 싶은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거늘. 과한 부지런함인지. 이른 현명함인지. 왜 우리는 생생한 아픔보다 시든 행복을 택할까.
밤 한강을 지났다. 까만 융단으로 빛나는 강물이 예뻤다. 저 아름다운 흑빛 도화지에 아련히 맺히는 그리움이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너무 북적이는 것도 싫지만 한 명만 크게 떠오르는 것도 좀 아깝다. 옛 노트에서 잠자는 이들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에단호크의 날렵한 턱선을 스케치해본다. 강물에 손 빗금 그어 구획 정해주고 싶다. 강물 분양권. 내 그리움의 빛으로 떠오를 자격을 부여함. 평생 몇 장을 발급할 수 있을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우주에서 확실한 감정은 자주 오지 않는 법이라 했는데. 내 품. 숱한 그리움의 모서리들로 가슴 터져나가던 그 때도 좋았지만, 시시하고 단조롭게 흘러가는 적막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고요함과 나태함 사이.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 숨죽인 시간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