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는 시구처럼, 창밖엔 겨울비가 내리는데 나는 겨울잠을 잤다. 까맣고 촉촉한 겨울밤 공기에 휩싸여 화양연화ost 라도 들었어야하는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겨울비도 아닌데 아깝다. 으슬으슬 춥고 몸이 땅으로 꺼져 최대한 웅크리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애들 방학하고서 매일 아침 10시에 일어났는데 아침에 눈뜨니 8시. 어제 빨리 자 일찍 일어난 줄 알았다. 핸드폰이 울린다. 이른 시간에 누굴까. 사보기획자다. 업무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안쓰러운 마음에 물었다. “마감이 급하다더니 밤 샜어요? 아님 이렇게 일찍 출근한 거예요?” “어, 평소처럼 9시에 출근했는데요. 지금 10시가 다 돼 가는데.” 핸드폰 시계를 보니 9시 53분이다. 안방 시계가 고장났다.
게으름뱅이 신세를 들켰다. 웃기고도 민망했다. 어색했다. 이렇게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겨울잠은커녕 일년 사계절 부지런한 새처럼 일찍 깨어 먹이를 줍고 잠들 때까지 다람쥐처럼 쪼르르 쪼르르 영혼의 양식을 모으며 바삐 움직였다. 약속시간 어기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주어진 일 완벽히 처리하고, 안 되면 되게 했다. 남한테 덕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지는 말자가 나의 생활신조였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비교적 수월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촌각을 다투니까 상대방이 약속 늦으면 삐지고, 일처리 흐리멍덩하면 화났다. ‘도대체 왜 저럴까......’
그간은 운 좋게도 나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들과 일하느라 몰랐는데 작년부터 새로 들어온 사보기획자들이 실수가 잦다. 몇 번이나 헛걸음 하고 난처한 상황에 처하니 열불이 났다. 취재 장소 잘못 알려줘 택시타고 달려가는 길엔, 전화해서 ‘일 똑바로 못해?’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다른 동료 한 명도 약속개념이 별로 없다. 정말 답답했다. 그런식으로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못마땅해지자, 어느 순간 내가 못마땅해졌다. 꼰대에 소인배 같았다. 실수조차 덮어주지 못하는 옹졸한 사람.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고. 물 엎질러지면 추슬러 훔치면 될 것을. 지도 더러 늦어서 비굴하게 눈치 보고 구구한 변명 늘어놓으면서. 나를 용서하듯 기꺼이 용서하면 그만인 것을.
돌이킴의 끝에서, 삶의 속도를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자본의 속도'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마르크스 <자본>에 나오는 진짜 노동자. ‘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지만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고 말할 때의 그 노동자. 자본의 메커니즘에서 하나의 부속으로 쉼 없이 돌아가는 똘똘이표 나사였다. 오죽하면 노조상근간부로 2년 일하면서 인사담당 임원이 탐을 냈을 정도다.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사교의장에서도 근면성실의 습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삐끗하면 삶의 시스템이 멈추니까 몫을 다한 것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고작 또 다른 시시한 하루를 재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그것이 이삼십대에는 치열함으로 빛을 발했을 수도 있지만 사십대에는 좀 넉넉한 시간의 옷이 필요한 것 같다. 정확한 논리와 명쾌한 질서의 잣대는, 늘어진 뱃살 드러나는 쫄티처럼 이제 내게 안 어울린다. 갑갑하고 각박하다. 남 보기에도 안 좋고 나도 불편하다. 빈틈없이 야무지게 살려니 체력도 딸린다. 오래된 핸드폰처럼 일 하나 처리하면 어느새 배터리가 한 칸만 남는다. 아무래도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할 때인가 보다. 게으름이 아닌 느긋함으로, 조급함이 아닌 경쾌함으로, 주변의 것들과 어우러지는 행복한 삶의 속도를 만들어 나가야겠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