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엄마와 헤어질 땐 눈물이 난다 낙엽 타는 노모의 적막한 얼굴과 젖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차를 타면 추수 끝낸 가을 들판처럼 비어가는 내 마음 순례자인 어머니가 순례자인 딸을 낳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세상
늘 함께 살고 싶어도 함께 살 수는 없는 엄마와 딸이
서로를 감싸주며 꿈에서도 하나 되는 미역빛 그리움이여
- 이해인 시집 <엄마>, 샘터사
여성암 무료검진을 받으라는 통지서가 서울시에서 왔다. 작년 가을 즈음에. 기한이 12월 31일까지였다. 병원 가는 일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산부인과. 애 낳고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봤다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김점선 화가를 생각했다. 또 무료 건강검진을 받지 않다가 암에 걸리면 보험 혜택이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8년 전 애 낳고 진료실 출입이 1회도 없었던 나는, 아직 에미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새끼를 둔 나는, 목돈 모아둔 적금 통장이 없는 나는, 아파도 돌봐줄 친정엄마가 없는 나는 여러모로 검진을 받아야했다. 귀찮아 미루다가 12월 30일에 갔다.
병원 대기실이 미어터진다. 뒤에서 보니 노인학교 강당이다. 백발성성 할머니 할아버지. 그 틈에 있으려니 내가 최연소 귀염둥이;다. 적막이 흐르는 대기실에 또 다른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온 딸이다. 삼십대 초반 정도 됐을까. 후드티에 바지 입은 그녀는 간호사 지시에 따라 2층 진료실로 3층 검사실로 아버지를 수행한다. 몸놀림도 날래다. “이리 오세요. 아빠.” “아빠, 여기에요.” 아버지 수발드는 싹싹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할머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씩 하신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돼” “아들은 남이야. 장가가면 뺏기는 거라고.” “아들이 무슨 소용이에요. 요즘은 딸이 최고지.”
며칠 전 남편이 퇴근길에 우편물을 잔뜩 들고 왔다. 병원 것도 있었다.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펴봤다. 자궁경부암 검진 결과통보서. 결과는 class2. 반응성세포변화. 6개월 후 정기검진 요합니다. “남편, 이게 뭐야? 암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암은 아닌데 완전 정상도 아니네. 정상은 2년마다 받는데 6개월 후에 오라잖아. 별건 아닌 거 같아.” 둘이서 그런 얘길 무심히 주고받았다. 당장 정밀검사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결론을 내리고 부엌에서 밥을 하는데, 아빠만 오면 흥분하는 ‘꽃수레’가 조용하다.
뭐하나 싶어 찾아보니 저 구석에 뒤돌아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검진결과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어른도 판독불가인 그것을 아이가 해석해보려고 애쓰는 거다. 뭉클했다. “꽃수레 뭐해?” 아이가 멋쩍은 표정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말한다. "엄마,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마. 몸에 안 좋대..." "우리 꽃수레, 엄마가 암에 걸릴까봐 걱정 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한테는 꽃수레밖에 없구나.......” 늘 함께 살고 싶어도 함께 살 수는 없는 엄마와 딸은, 서로를 감싸주며 눈물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