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깨어나 생각하니 내가 하얀 눈을 덮어쓴 지붕 밑에서 자고 있었구나.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 하얀 세상 건너편 산도 마을의 집들도 길고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작 내가 그 눈 밑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으니! 지붕뿐 아니지, 내가 덮고 있는 이불도 하얀 양털에 하얀 목화로 짠 베다. 이불뿐 아니구나 내가 입은 잠옷도 하얗고 내복도 하얗고 낮이면 추워서 방 안에서도 입고 있는 오리털 겉옷도 새하얀 빛 하얀 것만 입고 덮고 하얀 쌀밥까지 먹고 의사가 권해서 포도당 하얀 가루까지 날마다 먹고 하얀 종이에 글을 쓰고 그러고 보니 이거야말로 전신만신 하얀 것뿐 하얀 것뿐일세.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어떤가? 마땅히 하얗게 눈같이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할 내 마음은? 자다가 깨어나 생각하니 내가 올겨울 내도록 하얀 눈을 덮어쓰고서 자고 먹고 숨쉬고 살아 있었네. 하얀 눈 하느님 선물을 덮어쓰고 있었네. -2001. 2. 12. 새벽에
이오덕 시집 <고든박골 가는 길>, 실천문학사
15층 부엌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단지 풍경이 아름답다. 오층짜리 아파트 자주색 지붕이며 놀이터며 주차장 자동차며 동산의 소나무, 그리고 건너편 용왕산까지 하얀 눈 수북하다. 근하신년 연하장에서나 보았던 비현실적인 그림이다. 지붕에 눈을 태운 163번 버스도 토마스기차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우리 아파트 옥상에도 눈이 덮여있겠지. 폭설이 내리니 산간지방에 사는 기분이다.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을 걷고픈 유혹도 있었으나 하루쯤 지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은 각각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 눈싸움을 하러 나갔다. 딸내미는 눈만 살살 만지고 왔는지 코끝만 빨간데 아들은, 자식의 얼굴을 몰라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팬티부터 잠바까지 흠뻑 젖었다. 물대포라도 맞은 게냐? 현관에서 옷을 벗으라고 했다. 옷에 묻은 얼음으로 변해버린 눈 조각을 털어 세탁기에 넣었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뚝배기에 고구마를 삶았다. 거의 군고구마처럼 익힌 노릿노릿한 고구마를 아이들은 하얀 우유와 단숨에 비워버린다. 식탁에서 일어나며 저녁메뉴를 묻는 잔인한 녀석들. 삼겹살 한 근을 꺼내 빨갛게 고추장 양념에 버무렸다. 아까 하나 남겨둔 고구마와 하얀 가래떡을 뚝뚝 썰어 넣고 같이 쟀다. 하얀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하얀 한글파일 펴 놓고 끄적끄적 글을 쓴다. 전신만신 하얀 것에 둘러싸여 종종거리다보니 어느새 하얀 낮이 저문다.
아파트가 낡아서 외풍이 있다. 해마다 찬바람 불어오면 양가 어머니들은 걱정이 늘어지셨다. 며칠 전에도 “날이 추우니까 덕윤이가 추운 집에서 고생할까봐 잠이 안 온다”고 시어머님이 한탄하셨다. 아버님은 “예전엔 윗목에 걸레를 두면 꽝꽝 얼었는데 그런 집에서도 다 살았다”고 일축하셨다. 엄마는 입동이 지날 즈음이면 현관문이랑 창틀에 ‘문풍지’라도 바르라고 성화셨다. 재작년인가, 시어머님이 70년대 일일연속극에나 나올 법한 진분홍 염료에 커다란 꽃무늬가 새겨진 담요를 깨끗이 빨아서 가져오셨다. 이걸 깔고 자면 한결 따뜻하다는 것이다. 장롱에 고이 접어두었던 촌스러운 담요를 올 겨울에 처음 꺼내 마루에 펴놓았다. 거기가 우리집 공식 아랫목으로 지정됐다. 식구들은 밖에서 들어오면 일단 담요에 손을 넣어 몸을 녹인다. 난 밤이면 밤마다 아랫목의 유혹을 못 이기고 분홍담요에 몸을 묻는다. 얼굴만 내놓고 책보다가 10분 내로 잠들어버리곤 한다. 코끝 시린 나른함에 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