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추위가 출렁이고 새하얗게 눈보라 아득한데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짝 눈뜨는 그리움 하나 가엾고나 강물도 얼어붙어 흐르지 않건만 빈 가지엔 찬바람만 걸려 울건만 취한 듯 눈부시게 새해에는 밝아 깊숙이 나를 꿈꾸게 하는구나 새해엔 빈손 들고 어정어정 발걸음만 떠돌지 않게 하소서 발걸음이여 이 세상엔 웃음도 많지만 서러움도 많아라 서러움이여 아직 하늘빛은 어둡지만 가슴가슴 고통도 많지만 빈 가지에도 새 생명의 숨결 부풀어오름을 나는 보게 되리 파랗게 눈물 속을 날아오르는 새들을 그리움을 얼음 풀리는 강물 소리도 듣게 되리 새해엔 빈손 들고 어정어정어정 걷는 발걸음이 꿈꾸는 우리들 빛나는 삶이게 하소서 발걸음이여
- 문충성 시집 <떠나도 떠날 곳 없는 시대에> 문학과지성사
오랜만에 영풍문고에 들렀다. 외국의 어느 서점에 간 기분이 이럴까. 길도 모르고 낯설었다. 그만큼 설렘도 크다. 서점마다 책 진열 방식이 다르므로 헤매다가 보물같은 책을 발견할 수 있다. 시집 코너로 발걸음이 향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앞에 섰다. 삼백여권 넘게 나란히 도열한 그것들. 가을날 벼이삭 흐드러진 황금들판만큼이나 탐스러운 영혼들의 결실이다. 처음 보는 시인, 스치듯 보았던 시. 미술관에서 그림 감상하듯 한 걸음 떨어져서 절절한 제목을 하나하나 훑다가 끌리는 시집을 편다. 뒷날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88년에 나왔고 94년에 재판인데 '값 3000원' 이다. 헌책방 값이다. 요즘 시집은 7000원인데 이십년 전 찍은 시집이라 두 권을 사도 6000원이다. 원플러스원 행사만큼이나 매혹적인 가격이다. 그런데 어쩐지 좀 서글펐다. 저 시인이 여기 와서 자기의 시집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20년 째 꼿꼿이 서 있는 다리 아픈 청춘의 언어들. 가엾다. 아마도 수십 번의 이사와 세월에 풍파를 견뎠을 장한 시집 두 권 얼른 챙겨왔다.
도심에서 금 캐듯 발굴한 시집처럼 기분 좋은 선물 같은 한 해였다. 2009년은. 은유로서의 선물이 아니라 진짜 선물도 받았다. 몽땅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주로 책과 CD... 그리고 원두커피, 사과, 상추, 내가 더 사랑해 컵^^
2009년은 '좋은 인연 농사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블로그라는 자그마한 인연의 텃밭에서 농사의 기쁨을 누렸다. 어디선가 바람 타고 날아온 인연의 씨앗들. 마음 나눌 친구가 생겼고, 맺었던 관계가 깊어졌고, 멀어졌던 인연과 재회했다. 엄마의 3주기를 무사히 지내고 마음자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3년간 눈물 섞어 해드리던 아버지 반찬봉양도 면하게 됐다. 생살 떨어지는 아픔 겪으며 태지매니아 운영자를 그만두었다. 홀가분한 일반팬의 자리로 돌아와 십년간 온라인에서 정들었던 친구들도 만났다. 태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친구들을 통해 갚으려 애썼다. 맑스와 프로이트를 만났고 그들이 인도하는 인간세상의 다양한 지층을 여행했다. 언제나처럼, 하하호호 웃음도 그렁그렁 서러움도 가슴가슴 고통도 많았다. 감각의 풍요안에서 행복했다. 올해 마지막으로 본 영화 ‘위대한 침묵’에 이런 말이 나왔다. 봄은 겨울에서 오지 않는다. 침묵에서 온다. 2010년은 빈 가지에 새 생명의 숨결 부풀어오름을 준비하는 조금은 조용한 날들을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