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장대 세간은 단출하다.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 비비크림 정도. 가끔 아이크림이나 향수도 끼어있다. 입국자들에게 선물 받은 건데, 끝까지 써본 적이 없다. 성의가 고마워 간직하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것들은 쓰레기통에서 서글픈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아이크림은 사용률 50%를 상회한다. 향수는 거의 0%다. 그런 내게, 재작년에 모기업 홍보실 사보담당자가 향수를 선물했다. 기업 홍보용 카피문구에 아이디어를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더니 고마움의 표시로 주었다. 역시 화장대에 진열해두길 두어 달. 어느 날 한번 써보자고 마음먹고는 뿌려보았다. 음. 향이 은은했다. 산뜻하고 삼삼했다. 그후, 화장대 위에 놓인 투명한 고것이 어쩌다가 눈에 띌 때면 반가운 맘에 콧노래 흥얼거리며 칙칙 좌우 일회 분사하고 허공에서 비처럼 내리는 향수입자를 맞곤 했다.
지난달 즈음. 외출하는 길에 제과점에 들렀다. 빵을 사고는 지갑을 찾느라 한참을 서서 옷과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점원이 묻는다. “아, 이 향수...무슨 향수죠?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향수였는데...” 그 순간. 난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너무 많이 뿌렸나 염려돼서다.-_-; “버..버..리향수요.” 버벅거렸다. “거기까지 나요? 향이 독한가요?” 그녀는 아니라고, 좋다고 그랬다. 엄마가 이 향수만 썼는데 오랜만에 맡아서 좋았단다. “아..네..” 지금은 엄마가 안 계신 걸까. 뭔지 모를 민망함과 쓸쓸함에 황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월요일. 또 오랜만에 향수비를 맞았다. 저녁에 세미나 하는데 옆자리 선생님이 말을 건다. “나 이 향수 좋아하는데...” 난 또 책상 밑에 들어가고 싶었다.-_- “아침에 뿌렸는데 아직도 향이 나..나봐요?” “내가 이 향에 민감해서...” 그러더니만 향수에 얽힌 이런저런 추억을 풀어놓는다.
이십대 때는 향수냄새가 불편했다. 심지어 머리도 아팠다. 그들을 외화내빈이라며 얕봤다. 헌데 한해두해 감각세포가 무뎌지면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되니까 차츰 향수도 향기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내가 향수 뿌리는 여자가 될 줄은 몰랐다;; 아울러 그 향수가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올 줄은 진정 예상치 못했다. 아무래도 나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향기는 진짜, 외부에서 덧입혀진 향수는 가짜라고 여겼던 듯싶다. 그치만 원래부터 진짜와 가짜는 없다. 향기로 말을 걸면 그것이 그 순간 진짜다. 기성품 향수가 내면의 향기가 못하는 일을 하기도 하잖나. 대립구도로 세상을 감각하면 절반은 놓치는 것 같다. 향수에게 배웠다. 사랑은 가도 향기는 남는다는 걸. 냄새는 그 자체로 물고늘어지는 사랑이었다. 아직도 사분의 삼은 족히 남은, 뭇사람들의 기억을 복원시키는 나의 똘똘한 향수. 정성껏 써야겠다. 누군가는 그 향수를 통해 사랑을 호흡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