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하고도 흐린 날. 온종일 비가 내렸다. 살얼음 낀 바람이 불지 않았고 쌀쌀하지도 않았으나 이제 가을비라고 말하지 않는다. 포털화면에 뜬 ‘겨울비’ 뉴스 자막을 보고 가을이 홀연 떠났음을 알아차렸다. 11월 가기 전에 가을 먼저 갔다. 그래서 그랬나. 거리에 낙엽이 소용돌이처럼 휘감길 때는 봄처녀 가슴 부풀어 오르듯 안절부절 못하겠더니 요 며칠은 마음 없이 산 거 같다. 세상과 연결된 코드를 빼버린 것처럼 적막했다. 몸에서 가을이 쑥 빠져나가 그랬나보다. 아쉽다. 그러고 보면 내 속에는 참 많은 것들이 소리 없이 들고 난다. 오래 머물다 가는 것도 있고 미열처럼 한나절 흔들고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인생을 줌아웃해서 보면 모든 인연 마음 빌려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일 게다.
오래 머무는 사람 있다. 그립다. 포도주처럼 오래 묵어 깊어진 인연. 태지에 관한 마음은 터놓는 순간 팬심으로 환원되어 버리기 때문에 참 멋쩍기도 한데, 난 팬이라 하기엔 너무 아는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다. 정보, 열의, 충성도 모든 측면에서 함량미달이다. 시골엄마처럼 자식이 하는 일 잘 모르고 그냥 마음줄만 대고 있는 꼴이다. 짧지 않은 세월 그랬다. 한 달 전에 나의 베푸 그녀와 포도주 한 잔 앞에 놓고 그런 얘길 했다. 우리가 만난 게 스물아홉이고 지금이 서른아홉이다. 우리의 이십대는 너무 뜨겁고 미숙했다. 조금씩 세상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하는 삼십대. 생의 중요한 시기를 태지와 함께 시작했고 통과했다. 인연의 넝쿨 위로 옆으로 번져갔고 그의 그늘 빌려, 지난 십년간 우리 참 치열하고 알차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니 태지는 우리에게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다, 라는 그런 미담이었다.
어제는 토요일이 꼭 월요일처럼 공허하고 쓸쓸했다. 태지가 그리웠다. 어디서 뭐하고 지내는지. 외로울 텐데. 투명인간 외투 걸치고 만나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며 말벗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나누고 싶은 얘기가 한 보따리인데. 해치지 않을 텐데... -_-; 언제부턴가 그가 젖은 눈으로 머문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렇다. 네 눈물 닦아줄게.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