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경험치에 비례해 발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체험이 감각세포를 단련시키는 것 같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고통 그 후,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가을나무의 단풍이나 밤하늘 둥근달이 이전과 같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또 자아가 와해되는 통증으로 몸부림쳐본 사람은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고유의 느낌을 짚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전에 강원래씨 인터뷰할 때 그것을 느꼈다. 초반 이십 분 정도나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가 댄스가수시절 얘기하다가 문득 “서태지씨 좋아하세요?” 물었다. 난 분명히 힌트가 될 만한 단서를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시절, 클론 활동 당시의 무용담을 가슴 설레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서태지와아이들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아마 내 눈빛이 달라졌었나보다. 무심결에 상체를 좀더 바짝 땡겨 앉았을지도 모르고, 감탄사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그가 인터뷰 끝날 때 물었다. “B형이시죠?” “네..어떻게 아셨어요?” “송이가 B형이거든요.” “아..네..^^;;;”
내 인생의 쓰나미로 인해 나도 철이 좀 들었을까나. 나아진 부분도 있고 나빠진 부분도 있겠지만, 홀연 뇌리를 스치는 느낌의 지각체계와 안색을 살피는 기술은 확실히 섬세해졌다. 특히 누가 힘든 것은 금방 알아차린다. 일터가 목동이라 오가며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시는 후배가 있다. 그날도 밥 먹으러 만났는데 얼굴이 안 좋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맥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맥주광이라서 평소에도 자주 붓기는 하는데 그 날은 뭔가 달랐다. “너 어제 울고 잤지? 속상한 일 있구나?” 난 ‘절망을 말해보렴’ 다독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에게 그간 쌓인 원한감정을 한바탕 쏟아놓았다고,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후회스럽다고 했다. 어쩐지. 얼굴에 아룽대는 상심의 그림자가 새벽 서너시까지 눈물바람한 견적이었다. 지난주에는 선배한테 ‘아현동철거사진전’ 보러가자고 문자가 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가겠으니 담에 가자’라고 답을 하려다가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망설였다. 좀처럼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강인하고 냉철하기 이를 데 없는, 나하고는 종 자체가 다른 사람인데 그날은 문자만으로도 어떤 '흔들림'과 '갈망'이 읽혀졌다. 난 발목잡는 할 일을 제쳐놓고 안도현의 시구,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연탄이었느냐를 읊조리며 나갔다 -_-;
아현동사진을 휘리릭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 언니가 무심히 말했다. 며칠 전에 자살하려했다고.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언니는 한다면 할사람 같아서다. 대학1학년 때 운동하다가 만난 남편이 약한 천성에 높은 이상주의자라서 언니의 삶은 지독히 고단하고 외롭고 힘겨웠다. 문사철의 여왕답게 논술로 생계를 꾸리며 살아왔는데 지친 모양이다. 생얼로 다녀도 보기 좋은 막강 동안이었건만 흰머리도 부쩍 늘었다. 길모퉁에서 녹아가는 늙은 눈사람같았다. “여기서 나만 빠져나가면, 지들이야 알아서 살든 말든 다 끝날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어.” 나 같았으면 눈물콧물 범벅돼서 얘기했을 텐데 저렇게 담담할 수가 없다. “언니.형부 잘라버려. 바람 같아서 끊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암튼...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원래 강한여자는 외롭다. 만나길 잘했지. 관계는 노릇이 아니라 버릇(김영민)이라 했던가. 아픈 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해주어야겠다. 이제 착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