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 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 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 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 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 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 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산초당
그날은 7시에 눈이 떠졌다. 평소보다 20분 앞당겨진 기상시간. 아침공기가 쌀쌀해지자 이불이 착착 몸에 감긴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겼다. 애연가가 하루의 첫 담배를 찾듯 손 뻗어 더듬더듬 라디오 스위치를 눌렀다. 조용히 음악만 흘러 애청하는 FM93.1 역시나 음악이 눈발처럼 날린다. 바이올린 선율이 아름다운 스비리도프의 올드로망스다. 하얀 눈밭 같은 포근한 이불에 누워 허공을 부유하는 눈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쫓는다. 손등 위로 콧등 위로 뺨 위로 음악이 살갗에 내려앉을 때마다 움찔움찔 감각이 깨어난다. 저 가벼운 음악은 얼마나 힘이 센가.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이더니 온갖 상념 요동친다. 꿀처럼 달콤한 시간에 하필 악몽처럼 질긴 생각이 떠오른다. 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걸까. 삶과 죽음의 견고한 경계가 탁 풀리는 느낌. 난데없이 눈물이 흐른다.
여기에 누워있을 적에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슬픔으로 가득찼다. 남편이랑 딸내미랑 셋이 누우면 여백 없이 꽉 차는 공간. 고개 돌리면 옆에는 오래된 고동색 노송가구 장롱. 발아래는 세트인 고동색 화장대, 그 옆에는 고동색 문짝. 머리 위에는 밤색 영창피아노. 방이 아니라 오동나무 관이었다. 집이 좁으니 소음차단과 사적 공간 확보가 안되었다. 아침마다 새벽같이 일어난 남편이 장롱 문을 삐익 열고 와이셔츠 꺼내는 소리, 윙윙 면도하는 소리가 이어폰 낀 것처럼 생생히 들렸다. 벽 하나 사이에 둔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리면 내 인생이 통째로 하수구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그리 오래지는 않았으되,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눈을 뜨는 미명의 그 서늘한 느낌이 너무 싫었다. 신영복선생님이 여름 징역이 자기의 옆사람을 미워하게 되어 나쁘다고 말한 것처럼 그랬다.
밤이면 어린 것 옆에 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서형이 할머니 기억나? 응. 어떤 거? 할머니가 우리 쌀강아지~하면서 내 뺨을 이렇게 만져주신 거. 할머니 돌아가신 날 엄마는 먼저 병원에 가고 오빠랑 나랑 일어난 다음에 아빠랑 같이 병원에 갔는데 내가 주황색 의자에 앉아 있었어. 할머니 절두산에 묻힐 때는 달팽이 원피스 입었고.. 훌쩍이며 구구절절 이어진다. 눈물로 코팅된 엄마의 번들거리는 얼굴을 힐끔 보고는 아예 흐앙 울음을 터뜨리더니 그런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엄마가 할머니 생각 까먹게... 영원처럼 길었던 그 밤. 흰 바람벽에 가난한 어머니가 아른거렸다. 울엄마는 어째서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낮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을까.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는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종종 오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