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술은 있어도 홧라면은 없을 텐데. 밤 12시가 넘어서 홧김에 라면을 먹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늘 황당하다. 이틀 전에 널어놓은 빨래는 건조대에 그대로 있고, 마루는 장난감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고, 그저 설겆이 하나 해놓은 남편은 드르렁 드러렁 잠을 자고 있다. 딸아이는 졸린 눈을 부비며 토끼처럼 앉아서 엄마만 기다리고 있다. 저녁 뭐 먹었냐고 물어봤더니 라면이라고 한다. 화가 났다. 지난주엔 돈가스 시켜먹더니. 있는 반찬에 집에서 밥 좀 해먹이면 안 되는지. 내가 김밥을 싸놓거나 반찬을 해놓지 않으면 대개 이런 식이다. 짜증이 치민다. 표면적인 이유는 '애들한테 부실한 저녁을 먹였다'는 것이고 내면적인 이유는 매사 편안하고 쉽고 단순한 사고체계로 사는 남편에 대한 원한을 가장한 부러움이다. 난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통속극처럼 반복되는 갈등. 아니 나 혼자 열폭하는 거다. 남편은 자기가 해놓지 않아도 가사노동의 최종책임자가 자기가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거다. 나처럼 비빌 구석이 없는 사람만 졸면서라도 빨래를 개킨다. 인생이 불공평하다. 난 왜 포기가 안 될까. 집안살림이든, 결혼이든. 단 한 번도 확 살아버리지 못한 근면하고 가련한 내 인생. 선배말대로 아무래도 '엄마'로 너무 오래 살았나보다. 충동의 작동기능이 마비됐다. 우울해서 글 쓰려고 자료를 찾기 위해 폴더를 뒤지다가 일년 전에 써놓은 심경고백글을 발견했다. 구질구질하다. 내가 우연히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으면 내 노트북을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서 암호글로 바꿔놓았다. 그글 아래 '바다가 내게' 라는 화일이 있어서 열어봤더니 문병란 시인 시가 적혀있다. 삶의 벼랑 끝에 자주 서는 외로운 고아는, 그즈음 심난한 마음을 기대려 바다를 불러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