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덥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정호승 시집, <새벽편지>
작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후에 딸이 말한다. "엄마, 우리 오랜만에 김광석 음악 좀 듣자~ 그동안 너무 안들었어~" 난 뜨끔했다. 맞다. 김광석 음악을 그의 기일을 보내고나서 한번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 안 듣긴했는데 지금은 안돼. 낮부터 너무 슬프잖아.." 그랬더니 딸이 묻는다. "왜 슬퍼? 김광석이 죽어서?" "응..." 하지만 그가 죽어서 노래가 슬픈 건지. 노래가 슬퍼서 그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1월 6일은 김광석 기일이다. 김광석 생일은 1월 22일이다. 기쁘게도 나랑 생일이 같다..; 자기가 태어난 달에 죽으면 축복된 죽음이란 얘길 어디서 들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이 겨울에 떠난다는 것, 하냥 쓸쓸하고 그래서 멋지다. 나에게도 그런 계획이 있었다. 생일날마다 영정사진을 찍어둘 심산이었다.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생일날마다 죽음의 틀에 들어가 죽음의 의식을 치르고 싶었다. 꾸준한 훈련으로 요란스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으나 이런 계획 자체가 부산스러움의 표출이되겠구나 싶어 말았다. 불과 일년 전 일인데, 내가 참 유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_-
김광석은 전태일이다. 죽음으로써 살아 있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얼마나 많은 영혼을 위로하는가. 나역시 그에게 진 빚이 많다. 깊은 밤에 <혼자 남은 밤>을 들으면 그가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을 켜보면 그의 수더분한 웃음에 같이 웃고 그의 애잔한 음성에 눈물 짓는다. 김광석이 막 데뷔했을 때 연대 노천극장에서 <이 산하에>를 부르는 모습도 좋아한다. 새파란 청춘의 의연함이 흐른다. 티슈통에서 휴지 뽑아 코 풀어가며 듣는 곡은 <이등병의 편지>이다. 김광석이 자기 형이 군대에서 죽었다는 얘길 '우정의 무대'에 나와서 하는데 그의 목소리에 울컥 하고 보석같은 눈물이 걸리는 장면은 봐도 봐도 슬프다. 삶이 어찌나 서러운지 모른다. 김광석의 어머님은 아들 둘을 먼저 보내셨으니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지셨겠구나 생각하면 또 슬프다.
김광석 노래 중에 가장 아끼는 노래는 <부치지 않은 편지>다.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였는데 참으로 맑아서 슬픈 곡이다. <공동경비구역JSA>에 나와서 유명해진 노래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이 그랬다. 이 노래를 500번쯤은 들었는데, 관객이 아닌 배우들을 울리기 위한 노래라고. 이 노래는 정말 슬프다. 죽은이를 향해 노래한 이 시는 김광석 본인의 주제가 같기도 하다. 사람살이의 참혹함에 대한 절망. 시린 절망. 그는 곡비일까? 울고 싶은 사람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곡비. 울다 지쳐 영원히 잠든 곡비.
정호승 시집 <새벽편지>(민음사, 1987) 에는 '부치지 않는 편지'란 시가 14쪽 15쪽에 나란히 쌍둥이처럼 두 편이 있다. 또 다른 '부치지 않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광석이 형에게 읽어주고 싶다. 좀 늦었지만.
'...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다시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인생을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