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같은 바지 / 이오덕 '두껍고 푹신한 마음을'

10년쯤 전에    광화문 땅밑    교보문고로 들어가는 길에서    사 입은    누런 골덴바지,    그게 몇 해 전부터    무릎 쪽이 헤지고 엉덩이가    빵꾸날 지경이라    더 입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서리가 하얗게 내린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라    마침 그날 찾아온    서울 ** 동 어느 골목에서    삯바느질하는 고호자 씨한테    부탁을 했다.    이 바지 좀 꿰매 주실 수 있을까요?    이 뒤쪽과 두 무릎 안쪽에    좀 큼직하고 두꺼운 천을 대어서    누벼 주시면 좋겠는데요,    더구나 무릎은 몇 해 전부너    늘 찬바람이 일어날 지경이니    푹신한 걸로 대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고씨가 보더니 그렇게 하겠다면서 가져가더니    일 주일 뒤 꿰맨 바지를 가져왔다.    날씨가 추운데    빨리 입으셔야지 싶어서요 하면서.    그걸 입어 보니 와아,     무플이 후끈후끈    앉아 보니 엉덩이가 푹신푹신    이렇게 좋을 수가!    이렇게 좋은 바지는 정말이지    내 평생 처음이다.    나는 고씨의 그 꼼꼼스럽고 정성들인    바느질 솜씨가 너무 고맙고,    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없는 바지를    이렇게 소중히 잘 기워서 가져온    그 마음이 놀랍고 반가워서        앞으로 나도 죽는 날까지    이 바지를 입으면서    이 바지처럼 살기로 작정했다.    비록 내 몸은 다 늙고 헐어 못 쓰게 되더라도    나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쓸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모든 이웃들에게    두껍고 푹신한 마음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처음 입어 보는    내 몸 같은 그 좋은 바지를 입으면서.     - 이오덕 시집, <고든박골 가는 길>

이 날이 지나고도 한참이 춥지만 겨울이 훌쩍 떠나는 느낌이 드는 날은 1월 31일이다. 13년 전 서태지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눈물같은 몸을 하고 서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선언문을 읽던 날도 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눈싸라기까지 흩날리고 스산했던 기억. 지난 토요일도 쓸쓸했다. 바람꼬리가 나긋나긋 포근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몸이 자꾸 웅크러들었다. 목도리를 했다가 '짐이 될까봐' 풀어놓고 광화문엘 갔다. 나를 반긴 것은 삼팔선보다 더욱 강고하게 막아선 전경차들.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도 없이 청계광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돌아돌아 함성소리를 찾아 집회현장엘 갔다. 급조된 듯한 무대. 음향설비가 좋지 않아 발언자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깃발, 국화꽃, 전단지 등을 손에 쥔 사람 숲을 헤치고 앞으로 갔다. 임시 분향소를 찾아갔다. 다섯분의 영정사진이 작은 병풍처럼 둘러져있었다. 약한 사람들, 없는 사람들은 겨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살려고 올라갔다가 죽어서 내려왔다던 그분들. 모든 생명이 하는 행동은 그저 살려고 하는 짓인데, 살려다가 죽었다. 마음에 난 구멍, 삶에 들어차는 찬바람, 바느질로 꼼꼼히 기울 틈도 없이 죽어간 분들. 불쌍했다. 조문을 마치고 다시 사람들 무리로 향하니 흰머리 희끗한 분이 보인다. 백기완선생님이다. 검은 두루마기에 하얀 목도리를 하셨다. 날씨도 추운데 찬 아스팔트바닥에 앉아 계시니 애닯았고 한편으론 외할아버지라도 뵌양 반가웠다.작년 촛불 때부터 집회에 나갈 때마다 뵙는다. 앞에 나가 발언도 않하시고 그저 묵묵히 한 사람 자리만 지키시곤 하는데 그 자리가 늘 커보이고 든든하다. 험난한 시대 온몸으로 살아내느라 여기저기 다치고 헤졌을 터인데, 정성스레 깁고 또 기워 두텁고 폭신해진 마음으로 부활하신다. 약한 것들에 대해 연민하고 감싸는 두툼하고 포근한 마음을 가진 선생님을 길거리에서 자주 뵙게 됨을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