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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 함민복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



순천엘 갔다. 순할 順 하늘 天이란다. 깨끗하게 빨아 입은 광목한복 같은 정갈하고 기품 있는 도시 풍광에 반했다. 순천만을 보았다. 무연히 펼쳐진 갈대숲. 노래방 화면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비현실적일 정도로 끝도 없다. 안쪽으로 드리워진 뻘밭. 찰지고 진득진득하다. 뻘의 부드러운 속살 그리고 물살. 하늘하늘 바람결따라 일렁이는 물결이 깊고 위엄있다. 동해바다의 집채만한 파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고귀한 기운. 오후 5시 노을빛이 입혀지니 하염없이 깊던 그것이 뭉근히 빛난다. '말랑말랑한 힘'이 저것이로구나. 딱딱하게 발기만하는 문명이 배워야할 큰 말씀.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보여주는 깊은 말씀. 그 위로 큰부리 도요새가 무리지어 하늘 위를 맴돌다 앉기를 반복한다. 먹을 것이 있고 노닐 물이 있으니 멀리서 알고 모여든 철새들이 신통했다. 

눈부신 서러움. 뻘에 부리를 비비적대면서 노니는 녀석들이 마냥 눈길을 잡아끈다. 부러웠다. 스물스물 서러움이 밀려왔다. 갯지렁이 구멍, 모시조개 구멍 저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다고 노래한 시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제 몸보다 높은 집 지은 놈 하나 없다고 뻘밭을 묘사했었지. 얼마전 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내가 왜 15층 공중에 떠서 자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파트의 엑스레이를 찍은 것처럼 건물이 투명하게 보이면서 사람들이 시멘트 한 바닥씩 깔고 층층이 포개어져 자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땅에 붙어서 자고 싶었다. 나 늙어가나. 높아만 가는 건물이 왜 이리 요즘들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갑갑한가. 기어코 그들이 가시려고 그랬을까.